강희룡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대략 사자성어가 600개 정도이며 여기에 속담, 격언, 명언들까지 합치면 무려 1천200여 항목에 이른다고 한다. 단순히 뜻을 함축시킨 사자성어도 있지만 고사(故事)에 기인된 ‘고사성어’는 과거의 이야기를 상황이나 감정, 사람의 심리 등을 비유적으로 함축된 내용을 묘사한 관용구이다. 예컨대 다다익선(多多益善)은 한신과 유방이 나눈 대화 중에 나온 말로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인용하면서도 뜻풀이에만 급급한 나머지 정작 여기에 얽힌 고사는 잘 모른다는 것이다. 사자성어를 뒷받침하고 있는 사실이나 역사를 바로 알고 나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뜻이 전혀 달리 이해된다. 이 다다익선은 단순히 ‘많을수록 좋다’는 내용 이면에 명장 한신의 오만한 성격을 함축하고 있어 이것이 결국은 한신이 ‘토사구팽(兎死狗烹)’당하게 되는 복선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파악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사자성어가 현실적인 필요성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혜의 차원에서 인생의 철리(哲理)를 깨우치게 한다는 것이다. 바닷물에서 소금의 결정체를 얻듯 한 글자마다 간결하고 의미심장하게 삶의 본질을 꿰뚫는 격조 높은 표현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사자성어를 적절하게 구사할 수 있다면 말의 격을 높이고, 나아가서는 삶의 풍요를 높일 수 있는 훌륭한 화법(話法)을 갖추게 된다.

한해가 거듭될 때마다 연말연시에 사자성어가 넘쳐난다. 이 사자성어의 사용은 단순히 글자의 조합을 뛰어넘어 민심과 세태를 절묘하게 반영하고 나아가 인간의 본질을 성찰하기 때문에 실천을 통해 가치와 매력을 재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해 직장인은 다사다망(多事多忙), 구직자와 자영업자는 고목사회(枯木死灰)와 노이무공(勞而無功)을 뽑았다. 직장인들에겐 늘 바쁜 한해였고, 구직자와 자영업자에겐 노력해도 별 성과가 없는 힘든 한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취업준비생의 ‘돈이음슴’(돈이 없음)이나 서류광탈(입사서류 심사부터 빛의 속도로 탈락)이란 이색적인 신생어까지 만들어진 것을 보면 서민들의 삶이 팍팍함을 느낄 수 있다.

제1야당 원내대표는 ‘도탄지고’(塗炭之苦·진흙과 숯의 고통, 즉 포악한 군주의 착취로 인한 백성의 고통)를 선정했다. 이 말은 4세기 남북조시대의 장안에 고립되어 있던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참상의 고사에서 만들어졌으며 천명사상(天命思想)을 내세워 정권을 무너뜨리려 할 때 자주 쓰인 말이다.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지난 정부나 현 정부나 고착된 빈부의 심화로 가난이 유산으로 대물림되고, 없어지지 않는 기득권층의 갑질, 2003년 이래로 OECD 회원국 중 현재까지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자살률을 보면 지난 일 년을 반영하는 사자성어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교수신문이 정한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라는 임중도원(任重道遠)은 ‘논어’태백(泰伯)편에 실려 있는 증자의 말이다. 증자는 선비의 임무인 인(仁)의 실현이 무겁고 그 길 또한 멀기 때문에 넓은 도량과 굳센 의지로 실천하다 죽은 후에야 그친다고 했다. 장자는 평생의 목적을 오로지 인의 실현에 두었기에 이 말이 가능했을 것이다. 시경 해설서인 한시외전(漢詩外傳)에 실려 있는 ‘짐이 무겁고 길이 먼 사람은 땅을 가리지 않고 쉬며,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었으면 벼슬을 가리지 않고 해야 한다.’이 말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는 위정자를 비유할 때 쓴다.

대학교수라는 학자집단이 냉철한 지성보다는 정치권을 기웃거리거나 경박한 감정에 무게 중심을 두고 선정한 것으로밖에 안 보여 씁쓸한 인상을 준다. 같은 상황을 두고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는 자신과 남에게 이중 잣대를 들이대는 지금의 현실을 사마천이 살아있어서 사자성어를 만든다면 그 역시 신조어인 ‘내로남불’에 무릎을 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