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의 평생을 지배한 고통 ‘홀로코스트’
한 인간의 평생을 지배한 고통 ‘홀로코스트’
  • 윤희정기자
  • 등록일 2018.04.26 21:09
  • 게재일 2018.04.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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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다비드 그로스만 지음·민음사 펴냄
징편소설·1만3천800원

▲ 다비드 그로스만 /문학동네 제공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문학동네)는 이스라엘 문학 거장 다비드 그로스만의 장편소설이다.

지난해 영국 맨부커 인터네셔널상을 받았다.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은 영국에서 영어로 번역 ·출판된 소설에 수여하는 상으로 2016년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에 널리 알려진 문학상이다. 영미권에서 노벨문학상 못지않은 권위를 자랑한다.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는 그로스만이 1986년 발표한 ‘사랑 항목을 참조하라’는 저자의 두 번째 장편소설로, 홀로코스트가 남긴 트라우마를 다뤘다. 2014년 이스라엘에서 처음 출간돼 히브리어 전문 번역가인 제시카 코언 번역으로 2016년 영미권에 출간돼 영미권 언론과 평단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작가를 마르케스와 귄터 그라스 급의 거장 반열에 올렸다.

그로스만은 전작 ‘땅끝에서’, ‘시간 밖으로’ 등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작가다. 이스라엘 현대문학의 거장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노벨문학상 후보로 수차례 거론되기도 했다.

1982년 첫 작품 ‘결투’를 출간한 이래 깊이 있는 지혜와 섬세한 감성, 탁월한 언어 감각으로 소설, 논픽션, 희곡, 아동서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해왔고,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이탈리아 발룸브로사상, 프랑크푸르트 평화상 등 세계 유수의 상을 수상했다. 또한 이스라엘의 현실을 과감하게 작품으로 옮기며, ‘글이 세계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작가이자, 이스라엘 정부의 팔레스타인 점령 정책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평화운동가이기도 하다.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에서 작가는 도발레라는 이름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두 시간 남짓 펼쳐지는 그의 공연을 한 편의 소설로 그려낸다. 공연의 시작과 함께 소설이 시작되고 공연이 끝나며 소설도 마무리되는 것이다. 이처럼 독특하고 참신한 설정 속에서 그로스만은 시시때때로 농담을 섞어가며 도발레라는 한 인간의 평생을 지배한 고통의 근원을 집요하고 철저하게 파고든다. 그리고 이 개인의 비극에 유대인의 고통스러운 역사, 이스라엘 현실에 대한 풍자를 함께 녹여내 삶의 고통과 유머가 공존하는 희비극을 탄생시킨다.

이스라엘의 도시 네타니아에 위치한 작은 클럽. 한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무대에 오른다. 이름은 도발레 G. 오늘 쉰일곱번째 생일을 맞은 그는 찢어진 청바지에 금색 클립이 달린 빨간 멜빵으로 멋을 부리고 카우보이 부츠를 신었다. “날씨가 좋아도 간신히 158센티미터”인 키에 갈비뼈가 무시무시하게 드러날 정도로 야윈 몸으로 무대에 올라선 도발레는 여러 테이블에 앉은 다양한 나이와 직업의 관객 앞에서 공연을 시작한다. 스스로를 “웃음을 사는 매춘부”라 칭하며 과장된 몸짓과 활기찬 목소리로 관객들에게 짓궂은 농담을 건넨다. 그리고 그 관객 사이에 이 소설의 서술자인 은퇴한 판사 아비샤이가 있다.

어린 시절 도발레와 함께 과외 수업을 받으며 아주 잠시 마음을 터놓는 우정을 나눴던 아비샤이는 사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도발레를 까맣게 잊고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도발레가 불쑥 전화를 걸어 자신의 쇼를 보러 와달라고 부탁한다.

도발레는 때로 웃기는 농담을 하고 때로 관객을 조롱하며 공연을 이어간다. 그의 공연을 몇 번씩 봤던 게 분명한 사람들과 처음 온 사람들, 한때 그와 알고 지낸 사람들이 섞여 있는 관객은 처음에는 그의 농담과 조롱에 호응하며 즐거워한다. 하지만 도발레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더 구체적으로는 열네 살 때 갔던 군사 캠프와 그후에 벌어진 개인사를 풀어놓기 시작하면서 공연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도발레의 공연을 통해 아비샤이를 포함한 관객은 도발레가, 아들의 실질적인 생활을 돌봐주지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뒤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리지만 아들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또래보다 왜소했던 그가 학교의 다른 아이들에게 심한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실도 듣게 된다. 아비샤이는 자신이 알았던 사실(도발레가 괴롭힘을 당했고 자신이 그를 외면했었다는 것)과 몰랐던 사실(그가 부모로부터 학대당했다는 것)을 들으며 도발레와 함께 군사 캠프에 있었던 때를, 도발레를 마지막으로 봤던 그날을 떠올린다. 그리고 다른 관객들이 공연에 불만을 표하며 하나둘씩 자리를 뜨는 와중에도 계속 그 자리에 앉아 그의 공연을, 그의 고통의 근원을 묵묵히 지켜본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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