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진 시인은 1941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65년 ‘현대문학’에서 박목월 추천으로 등단한 원로시인이다. 시집 ‘달하’,‘물로 바람으로’,‘날개옷’,‘달빛에 젖은 가락’,‘영원한 느낌표’등을 발간하면서 꾸준한 시작활동을 하였다. 목월문학상, 공초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월탄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이형기문학상, 구상문학상 등 숱한 문학상의 행운을 누렸다. 평생 서울대 생활과학대학 소비자아동학부 교수를 지낸 학자이기도 하다.
14권 가까운 시집들의 작품을 일별해 보면 시인의 시작의 기품을 느낄 수가 있다. 서구문학은 하느님의 구원과 은총을 통해 인간 구원을 언어예술로 풀어내었다면 오랜 세월 성리학의 세례를 받아온 우리나라 시문학은 자기 절제와 안존한 통제를 통한 인격 수련의 자세를 연마하였다. 그래서 문학의 지향성이 다른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았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한 이후 인간 중심의 존재 탐구 시대로 넘어왔지만 궁극적으로는 참 인간의 모습을 추구하는 일이 문예예술의 기본 바탕이 되었다.
유안진 시인은 선비의 고향 안동 명문가 출신이다. 그래선지 전형적인 반가의 여인으로서 그가 직조한 시작의 내면 속에 그 그림자를 읽을 수가 있다. 자신의 삶의 태도와 방법과 같이 안존하고 자신을 치켜세우지 않는다.
오양진이 ‘문학의 이유’(파란, 2023) 중 ‘숙맥노트’에서 유안진의 시작의 태도를 평한 바 있다. “말하는 시인이 아니라 귀로 듣는 시를 겸허한 자세로 제목처럼 숙맥같은 모습으로 인생을 조명하는 시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단히 정확한 평가라 아니할 수가 없다. 작가가 청자이면서 화자가 되기도 하지만 시인은 늘 낮은 자세로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심각하게 청취하는 양반가의 문화와 습속을 자신의 시속에 오롯이 담았다. 그는 조물주와 같은 창조자입네 하면서 잘난 체하며 머리를 쳐들고 세상을 향해 삿대질하는 시인이 아니라 기품을 유지하며 안존하게 소리를 듣는 시인이다.
화자가 내는 그 소리는 비록 표준어로 발화하지만 안동의 악센트와 안동의 화법이 묻어있다. 유독 어린 시절의 추억이 만연한 유년의 풍경화 속에는 안동방언이 묻어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자지러지게 불러대는 말매미들의 합창을/귀로 먹고 자라는 여름 가족들이/사람 떠난 마을에 더 주민답다”, 유안진, ‘귀도 입이다’에서 유안진 시인의 세상을 조망하는 방식이 보인다. 즉 낮은 마음으로 화자의 소리를 듣는 겸손한 청자의 모습을 읽을 수가 있다. 그리고 비록 화자가 사람이 아닌 말매미라도 고향을 지키니까 사람보다 중하다며 고향지킴이라는 명예를 부여해 준다. 참 신선하다. 오랜만에 시를 왜 읽어야 하는지, 시를 읽어보면서 인간 삶의 도리와 태도를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를 배울 기회를 얻는 것 같다.
만년에 40년 가까이 함께 살았던 남편의 죽음은 시인에게 꽤나 충격적이었을 것 같지만 오히려 자신의 소리는 억누른다. 대신 퇴근하면서 현관에 들어서는 남편의 투박한 목소리 “나 와 쏘!”에 섞인 사투리 억양. 그래서 더욱 그립고 안타깝다.
유안진의 ‘벌초, 하지 말 걸’에서는 들판 벌레들의 소리를 듣는 어머님의 혼령이 말한다. 표준어로 시를 썼지만 내 귀에는 마치 안동의 방언의 에코가 여운으로 날아든다. ‘모자’, ‘바늘에게 바치다’, ‘아버지의 마음’에서는 친정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화자인 어머니와 아버지의 목소리를 통하여 듣는다.
유안진 시인의 시작이 기대는 곳은 고향이다. 안동 어머니와 아버지와 형제 자매, 그리고 일가친척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할배요 오늘 장에 가시니껴?” 그리운 안동이 어느새 감익는 마을은 온통 고향으로 전환된다. “섶 다리로 냇물을 건너야 했던 마을/ …. / 까닭없이 눈시울 먼저 붉어지게 하는/ 아잇적 큰 세상이 고향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희망도 익고 익어 가느라고/ 감 따는 아이들 목소리도 옥타브가 높아가고/…./사람 떠난 빈 집을 붉게 익는 감나무 저 혼자서 지켜 섰다/ 가지마다 불 밝히고 귀 익은 발자욱소리 기다리고 섰다.//” 유안진, ‘감 익는 마을은 어디나 내 고향’에서는 시집을 가서 아이들을 낳고 시가 부모님과 조상을 모신 타향조차 내 고향으로 치환한다. 내 고향은 멀리 있어도 향기로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항상 함께 하는 곳이다.
시인은 계절에 대해서도 매우 민감하다. 봄과 가을 겨울의 흰 눈을 소재로 한 섬세한 서정일기도 고요하고 잔잔하게 울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