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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 송림숲

김대호기자
등록일 2008-09-19 16:19 게재일 2008-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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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드리 소나무, 크고 작은 암석··· 쪽빛하늘 숲에서 가을을 느끼다

고려 중엽 재상을 지낸 홍란이 남양지방에서 부림으로 옮겨온 뒤 부림 홍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온 이 곳은 현재 300여세대 7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원래 이름은 대야(大夜)였다. 그러나 밤 야(夜)자가 좋지않다 하여 ‘夜’자를 ‘율(栗)’자로 고친 후 사람들이 대율(大栗)의 순우리말 ‘한 밤’으로 부른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때문에 이곳에 처음 온 이방인들 중 엔 ‘한밤’이라는 마을 이름으로 보아 큰 밤나무가 많을 것으로 지레 짐작하는 경우가 많지만 주위엔 사과나무, 소나무 밖에 없어 그들을 의아하게 만들기도 한다.


자연의 공원 대율리 송림(한밤성안)


대율 초등학교 정문까지의 도로(국지도 79호선) 양쪽 1만5천여㎡의 평지에 수 백 년이 넘을 듯한 아름드리 노송 수백 그루가, 저마다 나이가 오래 되었음을 뽐내면서 서로 많은 가지를 펴 온 하늘을 덮고 있다.


그 아래는 자역적으로 시원한 그늘이 이루어 져서 여름엔 무더위를 모르게 하고, 겨울엔 푸른 빛을 주어 우리의 눈을 부드럽게 해 줄 뿐만 아니라 특히 눈 덮인 숲의 설경이야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경치이다.


소나무 사이사이에는 크고 작은 암석들이 흩어져 잔디와 돌풀과 조화를 이루어 앉을 자리와 쉴 곳을 마련해 준다.


한밤성안이란 부계면 대율리 입구의 국지도 79호선 도로변 양쪽소나무 숲이 있는 대율리 송림일대를 말한다. 한밤성안 숲은 임진왜란 당시 마을 출신인 홍천뢰 장군이 군사를 훈련하던 장소로서, 주변에 성을 쌓아 성안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숲의 소나무는 임진왜란 이후에 조성되었으며 수령은 300년 정도로 추정된다. 풍수적으로 보아 수구막이를 위해 조성되었으며 마을이 배 모양이어서 뱃머리에 위치한 숲에 솟대를 세워 마을의 무사안녕을 기원했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곳의 지혈이 호상이라 양눈에 해당하는 곳에 작은 못을 파고 코 끝 부분에 좌우로 성축을 쌓아서 외적의 침입을


막았고, 또한 외부에서의 나쁜 재앙이 못 들어오게 동제를 지냈다고 한다.


송림 한편에는 천연 고목이 썩어 쓰러져 있고 그 자리에 높이 3m가 넘는 돌을 세워 진동단을 만들어 놓았다.


옛날 동네를 수호하던 천연고목이 썩어 쓰러진 후 60년(1갑자)마다 대홍수가 닥치자 주민들은 재앙을 막기 위해 그 자리에 3m 높이의 오리솟대(진동단)를 물위에서 균형을 잃지 않는 오리의 형상으로 바위 끝에 조각해 배의 균형을 잡으라는 의미로 세웠다고 한다.


또 마을 전체가 선형이라 ‘배에 구멍이 뚫리면 수해가 난다’ 해 이 마을에선 함부로 우물을 파지 않았다.


자연의 공원 대율리 송림은 애국과 효를 배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이 마을 태생인 홍천뢰 장군이 의병을 모아 훈련을 하였던 곳으로도 유명하며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故박정희 대통령이 비의 제자를 쓰고 영남대학교 총장이었던 이선근 박사가 비문을 지은 큰 비(높이 6m)가 이 곳에 서 있다.


또 하늘은 물론 짐승까지도 감동케 한 효자가 세상을 떠나자 호랑이가 문밖에 와서 크게 울며 슬퍼하였고 까마귀 떼들이 온 하늘을 덮어 하늘이 내린 효자의 마지막 길을 조상했다고 전해지는 홍영섭 효자비가 송림에 있다. 이 비는 홍영섭의 사친이효를 추모하기 위해 1934년 건립했으며, 옥새형 가첨석과 비신, 귀부로 구성되어 있다.


대율리 송림은 바로 옆에 흐르는 팔공산 계곡의 맑은 물, 주위에 둘러 싸인 높고 푸른 산, 우거진 노송, 크고 작은 암석 등의 자연 경관에다 인공적으로 세운 충의비, 효자비, 오층탑 등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큰 공원을 이루고 있어 학생들의 수련장, 도시인들의 소풍장소로 인근 대구시, 구미, 영천 등지에서 많이 찾고 있다.


/김대호기자 dhkim@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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