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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유턴

등록일 2026-03-25 16:09 게재일 2026-03-26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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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병원에서 손목골절 수술을 받고 나오신 어머님 모습.

병실 문을 열자마자 어머님과 눈이 마주쳤다. 심전도 센서를 단 손을 거칠게 휘저으며 눈을 감아버리신다. “어머님, 눈 좀 뜨고 말씀해 보세요. 손자도 왔어요.” 그제야 눈을 번쩍 뜨시지만, 이내 나가라고 손사래를 치신다.
“내가 병원에 온 거냐, 죽으러 온 거냐. 나를 여기 버려두고 잠이 오더냐.”
잠시 숨을 고른 뒤, 낮은 목소리가 이어진다. “집에는 언제 갈꼬. 갈 수는 있을꼬.”
오늘도 일 마치고 씻지도 않고 달려온 우리는 어머님의 모습에 힘이 빠진다.

아흔셋의 시어머니는 열한 살에 돌림병으로 온 가족을 잃었다. 거죽데기에 싸여 나갔던 동생이 시신 더미 속에서 기어 나와 둘만 살아남았다. 자매는 친척 집 식모살이로 흩어졌다가 오십이 넘어서야 다시 만났다. 그 모진 풍파를 겪고도 어머니는 늘 웃는 낯이었다. 그렇게 버티며 살아온 분이었다. 입담 좋던 분이 코로나 시기 고립을 견디지 못해 시골로 오셨다.

시골에서 어머님의 일상은 단조로웠다. 바깥출입은 우리 집을 오가는 정도였다. 재작년 여름, 사고가 터졌다. 다리가 불편해 집안에서도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는데 잠깐 순간에 콘크리트 바닥에 꼬꾸라졌다. 고관절이 부러졌다. 한창 과수원 일로 바쁠 때였지만 매일 병원에 오가야 했다. 자두밭에 응애가 퍼져 그해 농사를 망쳤다. 수습하느라 병문안이 뜸했을 때 “돈 많이 벌었나?”라며 서운함을 보이셨다. 그 말에 울컥해서 “농사 망쳐서 울고 싶은 거 참고 있다”라며 반응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말은 어머니보다 나를 향한 하소연이었다.

이번에는 손목을 다쳤다. 화장실에서 발을 씻으려다가 삐끗해 손목에 금이 갔다. 사고 후 혼자서 해결하려다가 상처가 깊어진 듯하다. 혼자 병원을 찾아 응급조치를 받고 돌아오셨다. 결국 안동병원에 입원하고 수술을 받았다. 수술실을 나온 어머니는 마치 중환자처럼 변해버렸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고통을 호소하셨다. 퇴원 후 옮긴 요양병원에서도 이성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부끄러움도 잊은 채 아프다는 소리만 반복하셨다. 정신을 놓은 듯 행동했다. 병실의 노인들은 비슷한 모습이었다. 누가 더 크게 아픈지 겨루는 듯했다. 가족들은 ‘이제 집으로 모시기는 힘들겠다’라는 체념 섞인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자식들이 모두 불려 왔다.

어머님도 그 분위기를 감지하신 듯했다. 갑자기 집으로 가겠다고 하셨다. 마음 약한 아주버님께는 “안 데려가면 침대에서 굴러떨어져 버리겠다.”라며 떼를 쓰셨다고 한다. 결국 남편은 병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님을 집으로 모셔 왔다. 집에 돌아온 어머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랑방에 멀쩡히 앉아계셨다. 끓여 놓은 호박죽도 달게 비우셨다. 
“그곳에 있으면 나도 그 사람들처럼 실려 나갈 것만 같아 정신이 번쩍 들더라.” 
열흘 사이 세 명의 환자가 떠났다고 했다.

코 줄과 소변 줄 없이도 어머니의 목소리는 다시 생기를 찾았다. 아흔세 해를 버텨온 그 질긴 생명력이 다시금 집이라는 안식처로 돌아오게 했다. 이제 더 조심하시라는 내 말에 어머니는 또 손을 내저으신다.
“나 혼자서도 다 할 수 있다. 가서 일 봐라.” 
그 모습이 평소보다 밝아 보였다. 그러나 다리가 불편한데다 팔목까지 수술한 상태라 당분간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다. 누군가 곁에 있어야 한다. 나는 대답 대신 마당을 바라본다. 시선은 사과밭으로 향한다. 봄볕 아래, 아직 손도 못 댄 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그 넓은 밭보다 먼저 돌아봐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손정희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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