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위탁 관리해온 8개 읍·면 수문, ‘인력 부족’ 핑계로 일방 반납
한국농어촌공사 고령지사(이하 공사)가 수십 년간 도맡아온 고령군 전역의 농업용 수문 관리권을 지난해 3월부터 돌연 고령군에 ‘반납’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인력 부족’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사고 위험이 높고 관리가 까다로운 업무만 지자체에 떠넘겼다는 비판이 거세다. 특히 다산면 등 저지대 농경지가 밀집한 8개 읍·면 농민들은 “국가 공기업이 농민의 생명줄을 담보로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며 분노하고 있다.
공사는 그동안 수리조합과 농업기반공사 시절부터 쌓아온 ‘물 관리 전문성’을 내세워 고령군으로부터 수문 관리 업무를 위탁받아 왔다. 양수장과 배수펌프장이라는 ‘심장’을 움직이는 공사가 그 통로인 ‘수문’까지 통합 관리하는 것은 재난 대응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공사는 지난해 3월, 고령군 관계자가 예산 신청을 하라는 공문서를 보냈지만 공사측에서 아무런 답이 없어 공사를 방문한 자리에서 일방적으로 “더 이상 인력이 없어 관리할 수 없다”는 내용을 들었다는 것이다. 수십 년간 이어온 신뢰 관계를 단칼에 베어버린 ‘기습 파기’였다.
이번 조치로 고령군 8개 읍·면의 재난 대응 체계는 ‘따로 국밥’ 신세가 됐다. 집중호우 시 낙동강 수위가 올라가면 수문을 즉시 닫고 배수펌프를 가동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수문을 닫는 주체(고령군)와 펌프를 돌리는 주체(농어촌공사)가 이원화됐다.
현장 농민들은 “비가 쏟아지는 급박한 상황에서 군청 직원이 수문을 닫으러 오는 시간과 공사가 펌프를 돌리는 시간이 어긋나면 하우스는 순식간에 물바다가 된다”며 “공사가 전문성을 버리고 행정 편의주의에 빠져 인재를 자초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더 큰 문제는 공사의 이중적 태도다. 공사는 현재 고령군으로부터 수백억 원 규모의 농업기반시설 정비사업(SOC) 등을 위탁받아 시행하며 막대한 ‘위탁 수수료’ 수익을 올리고 있다.
건설 사업을 따낼 때는 “우리가 대한민국 최고의 물 관리 전문가”라며 목소리를 높이면서, 정작 야간 대기와 긴급 출동이 잦은 수문 관리는 “인력이 없어 못 한다”며 비전문가인 군청 공무원들에게 떠넘긴 것이다. ‘수익은 공사가, 고생과 책임은 군청이’ 지는 기형적인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
고령군청은 갑작스러운 ‘폭탄 돌리기’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군 관계자는 “8개 읍·면에 산재한 수십 개의 수문을 기존 인력으로 실시간 관리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가 향후 침수 피해 발생 시 공사가 책임을 피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다.
수문 조작 미숙이나 지연을 이유로 지자체에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명분을 미리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박영진 한국농어촌공사 고령지사장은 “앞으로 군청과의 관계 개선을 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전병휴기자 kr5835@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