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x17cm 규격에 담긴 땀방울, 18도 소금물과 만나 3년 뒤 명품이 되다
와인에 프랑스 보르도가 있다면 한국 장(醬)에는 포항 죽장연이 있다. 해발 450m 고지대, 낮과 밤의 기온 차가 15도를 넘나드는 이곳의 서늘한 바람은 잡균의 침입을 막고 발효의 속도를 늦춘다.
‘빨리빨리’가 미덕인 시대에 죽장연이 굳이 1095일이라는 지독한 숙성 시간을 고집할 수 있는 건 오직 이곳의 기후와 환경만이 허락한 ‘느림의 미학’ 때문이다.
국내 미쉐린 스타 셰프들이 영하의 칼바람을 뚫고 이 오지 산골을 직접 찾는 이유도 바로 이 대체 불가능한 ‘죽장 테루아(Terroir·환경적 특성)’에 있다.
19일 오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상사리 산자락. 장독대 곳곳에서 항아리 뚜껑 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지푸라기에 불을 붙여 옹기 속 잡균을 태워내는 매캐한 연기가 걷히자 10여 명의 작업자가 달려들었다. 일 년 농사의 서막 ‘장 담그기’ 현장이다.
항아리에 들어가기 전 메주는 혹독한 목욕을 거친다. 수개월간 볏짚에 매달려 발효되며 묻은 먼지를 솔로 일일이 털어내고 흐르는 물에 씻어낸다. 죽장의 칼바람 아래 다시 몸을 말린 뽀얀 메주 20개가 옹기 바닥에 차곡차곡 박혔다.
“물 들어갑니다!” 소리와 함께 투명한 소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죽장의 기후가 허락한 ‘황금 염도’ 18%의 소금물이다. 물이 차오르면 빨간 고추와 검은 숯, 대추가 던져졌다. 마지막은 얇게 깎아낸 대나무살이 장식했다. 탄성 있는 대나무를 격자로 엮어 입구에 고정하자 소금물 위로 뜨려던 메주들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이 옹기 속으로 몸을 던진 메주 7000개에는 지독한 ‘이력’이 새겨져 있다. 마을 주민들이 재배한 햇콩을 참나무 장작불 무쇠 가마솥에서 3시간 삶고 7시간 뜸 들여 정성으로 빚어낸 것들이다. 가로 11cm, 세로 17cm 규격에 무게 약 1.5kg으로 성형된 메주들은 지난 70일간 15~26°C(습도 40~60%)를 오가는 발효실에서 노랗고 푸른 곰팡이를 속까지 꽉 채웠다.
항아리에 갇힌 메주는 이제 60일간의 ‘동거’를 통해 제 몸을 녹여낸다. 소금물 안에서 발효가 일어나며 딱딱했던 메주가 흐물흐물해지면 비로소 된장과 간장으로 나뉘는 ‘장 가르기’를 한다. 메주 덩어리는 건져내 치대어 된장으로 만들고 갈색으로 변한 소금물은 맑게 걸러 간장이 된다. 죽장연은 여기서 다시 3년의 숙성을 더해 맛의 밸런스를 완성한다.
작업자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린 죽장연 정연태 대표의 손은 거칠었다. 2500개의 항아리 하나하나를 살피는 그의 눈빛에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정 대표는 “우리가 만드는 장에는 특별한 기교나 기술이 없다. 상사리 주민들이 키운 콩을 사고 깨끗이 씻어 말린 메주를 죽장의 바람과 햇볕에 맡길 뿐”이라며 “화학 첨가물 한 방울 넣지 않고 정직하게 자연환경을 이용해 기다리는 것 그것이 우리 장맛의 유일한 힘”이라고 말했다.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