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신화가 깃든 '계림'...신비로운 전설로 남았다

최병일 기자
등록일 2025-12-23 09:13 게재일 2025-12-23 16면
스크랩버튼

신화가 깃든 숲은 신비롭다. 그것이 사실과는 거리가 있으리라는 걸 알아도 마음 한구석이 설레는 건 어쩔 수 없다. 숲 여행은 배경을 알고 봐야 그 신비로움이 더해진다. 김알지의 전설이 남아 있는 계림도 그런 곳이다. 알고 찾아가면 숲속 오솔길을 걷는 기분이 각별하게 다가온다.

△ 전설로 기록된 핏줄

대릉원 옆에는 계림이라는 숲이 있다. /정태겸 작가 

묘한 일치다. 이 땅의 지배자로 자리매김했던 인물은 대부분 알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동명왕, 탈해왕, 박혁거세, 수로왕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물론 그들의 이야기는 신화일 뿐일 터. 비유로써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부각하려는 의도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대체 왜 알에서 태어나는 난생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는 해석이 유의미해 보인다. 하늘에서 알을 내렸고, 타인의 힘이 아닌 스스로 의지와 힘으로 태어났다는 뜻이다. 이는 그가 사람이 아닌 하늘의 자손이기에 왕위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부연이 따라붙게 된다. 중국의 황제를 ‘천자’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울울창창한 계림의 모습_한국관광공사 제공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인 김알지는 난생은 아니다. 그는 태어난 것이 아니라 발견됐다. 경주 시내 한복판에 봉긋봉긋 솟아있는 수많은 고분. 이중 부장자의 정체가 확인된 것을 중심으로 대릉원이라는 구역이 설정돼 있다. 이 대릉원 곁에 첨성대가 있고, 다른 쪽으로 계림이 있다. 김알지는 이 계림이라는 숲에서 발견된다. 탈해 이사금의 집권 시기, 금성의 서쪽 시림이라는 숲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왕은 신하를 보냈고 그 숲에서 나뭇가지 위에 걸린 금빛의 궤짝을 보게 된다. 

신령한 느낌이 물씬 나는 계림. /정태겸 작가 

그 아래에서는 흰 닭이 울고 있었다. 신하의 보고를 받은 왕은 시림으로 가 궤짝을 열어보게 된다. 그 안에는 사내아이가 있었다. 하늘이 보낸 아이라고 여긴 왕은 아이를 태자로 삼고 ‘알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기라는 뜻의 이름이었다. 하늘이 보낸 아이답게 김알지는 총명했다. 탈해 이사금은 알지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다. 그러나 알지는 이를 다른 이에게 양보했다. 신성한 탄생 설화의 주인공이지만 왕이 되지 않은 몇 안 되는 희귀한 케이스로 남았다. 대신 그의 7대 후손이 왕위에 오른다. 이때부터 신라에 김씨 왕조가 시작된다.

이런 일련의 배경을 살펴보면 김알지라는 인물은 독특한 면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왕이 아니었음에도 탄생 설화가 있다. 심지어 그의 성 ‘김’ 씨는 그가 금빛 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붙었다. 그만큼 귀한 인물이라는 것. 실상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그의 기록은 탄생 설화 말고는 남아 있는 게 없다. 

그 어떤 정치적 영향력도, 업적도 남아 있는 게 없다. 오로지 김씨 왕조의 시조라는 것뿐이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는 건, 김씨 일가가 신라의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피지배 계급이 이해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을 거라는 점이다. 그의 7대손은 미추이사금이다. 제12대 왕인 첨해 이사금이 후대를 잇지 못하고 사망하자 제13대 왕이 되었다. 그는 제11대 조금 이사금의 사위이자 외삼촌이었다.

낙엽지는 계절의 계림은 그야말로 색채의 향연이 펼쳐진다. /정태겸 작가 

왕위에 오른 미추왕은 박 씨나 석 씨가 아닌 최초의 김 씨 출신 왕이었다. 아무래도 정치 기반이 약했을 것이다. 김알지가 금빛 궤짝에서 태어나는 이야기는 이 과정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는 자신의 선조를 하늘이 내린 인물로 만들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한 기록은 찾지 못했다. 역사에 가정은 의미가 없는 일, 그러나 비어 있는 공간을 채우는 상상력은 이따금 이렇게 여행에 재미를 더하는 요소가 된다.

△초겨울이 물든 왕릉

계림의 야경. /한국관광공사 제공 
계림의 만추 풍경. /한국관광공사 제공 

역사의 진실은 늘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에 있다. 물론 역사 이야기는 재미있다. 그러나 그 진실을 유추하고 가려내는 역사학자가 아닌 이상 구태여 매달릴 필요는 없다. 사실이 아니어도 이 숲에 깃든 이야기를 음미할 정도면 족하다. 그래도 충분히 흥미로운 여행이 될 수 있다. 대릉원에 들어서면 누구나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은 첨성대다. 그 뒤로 돌아 맞은편을 보면 월성이 있던 언덕 아래로 숲이 보인다. 이곳이 탈해 이사금 당시 시림, 지금의 계림이다.

대릉원의 둥그런 무덤과 어우러져 계림은 더욱 빛이 난다. /정태겸 작가 

계림이라는 이름 자체도 김알지의 설화에서 비롯됐다. 금빛 궤짝을 발견하던 그날, 나무 아래에서 울던 흰 닭에서 유래했다. 신라 사람은 닭을 신성시했다. 어둠을 몰아내고 아침을 알리는 동물이어서다. 황금 상자는 권력을 상징한다. 그러니 이 숲은 앞으로 김알지의 후손이 권력을 쥐고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이라는 예언자적 존재였던 셈이다. 

김알지의 등장 이후로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 부르던 이 숲은 계림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신라의 다른 이름이 계림이었다는 걸 상기하면, 이곳이 경주의 다른 어떤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고 신성한 숲이라는 것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오래전 신화가 태어난 숲은 가을에 잠겨 있었다. 늦가을이 가기 전 서둘러 찾은 보람은 충분했다. 아직은 군데군데 초록빛이 남아 있었고, 나무 대부분은 곱게 물든 단풍을 가지마다 거머쥔 채였다. 이 안에는 회화나무, 느티나무, 버드나무를 비롯해 총 25종이 자라고 있다. 전체 수는 510그루. 이중 직경이 100cm 이상이 15주다. 이 숲이 얼마나 깊은 역사를 가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나무들이다. 

초겨울이라 잎이 모두 떨어졌지만 가을철 황금낙엽은 그야말로 황홀하기 그지 없다. /정태겸 작가

숲의 크기도 2만3023㎡ (약 7000평)로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규모다. 잎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초겨을의 정경은 가야 할 길로 떠나기를 머뭇거리는 모습이었다. 아직도 온통 알록달록했다. 절정의 시기였어도 좋았겠지만, 만추의 느낌은 신화의 숲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저물어버린 왕국의 숲을 걷는 기분은 낙엽과 대비되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에 젖어 들게 했다. 누군가에게는 쓸쓸한 풍경일 수 있어도 생각하기에 따라 눈에 보이는 모습은 달리 다가오기 마련이다.

계절을 앞질러 더 빨리 왔다면 첨성대 주변으로 안개처럼 흩날리는 핑크뮬리도 볼 수 있었을 테지만, 이미 빛이 바래져 버렸다. 옛사람의 장신구를 장식했던 비단벌레 모양을 한 비단벌레 차는 첨성대를 지나 계림을 가로지르며 사람을 연신 실어 날랐다. 계림을 통과해서 나아가면 월성과 그 너머 월정교까지 이어진다. 그 사이의 교동 최 씨 고택과 향교, 교촌마을을 지나가도록 도로가 이어지고 있다. 경주를 여행하는 여러 코스 중 이곳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이곳을 찾은 대부분이 가족 혹은 연인이다. 경주가 제주도와 더불어 화려하게 부활하면서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하긴 한반도에서 이만큼 여행 인프라를 잘 갖춘 도시도 많지 않다. 고대의 도시는 현재의 추억을 빚어내는 여행지가 돼 있었다. 
글·사진/정태겸 여행작가

여행메모

황룡사지 청보리밭

황룡사지 청보리밭. /정태겸 작가 

과거 서라벌의 중심은 황룡사였다.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주목받는 대도시였던 서라벌은 불교를 중심으로 통일을 이뤘고, 그 위상을 보여주듯 황룡사의 높다란 9층 목탑이 높이 솟아있었다. 이제는 절터만 남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바로 곁에 경주의 필수 코스 분황사가 있고, 황룡사지역사문화관도 꽤 둘러볼 만하다. 4월의 꽃이 질 때쯤에는 절터 인근이 온통 청보리밭으로 뒤덮인다. 그 위에서 파릇한 새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들판을 노니는 재미가 각별하다.
글·사진/정태겸 여행작가 

이성혁의 열린 시세상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