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령이씨 집성촌, 고택 유산 즐비 조선 조리서 ‘음식 디미방’ 산실 고전 레시피 체험 프로그램 운영 전통주 빚기·다도·한복 체험도
영양군 석보면의 작은 마을, 두들. 이름부터 정겹고도 생경하다. ‘언덕 위의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이곳은 해발 300미터가 넘는 야트막한 능선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덕에 외부와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고, 안쪽으로는 그만큼 오랜 세월이 고이 쌓였다. 바쁜 도심의 시간과는 결이 다른, 느린 시간과 깊은 맛의 마을이다.
1640년, 조선 중기의 학자 석계 이시명 선생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이후 그의 후손인 재령 이씨들이 모여 살며 집성촌을 이룬 두들은 오늘날까지도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골목을 따라가면 석계고택, 석천서당, 낙기대, 세심대와 같은 유서 깊은 문화유산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돌담 사이로 흐르는 산들바람, 오래된 기와지붕 위로 드리우는 햇살은 그 자체로 한 폭의 수묵화 같다.
이 마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조선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이 탄생한 곳이라는 사실이다. 저자인 장계향 선생은 안동 장씨로, 조선시대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문(文)과 식(食)에 모두 능했던 인물이다. 그는 한글로 가정식 요리법을 정리해 당시의 음식문화를 후대에 전하고자 했으며, 단순한 요리법을 넘어 음식에 깃든 정성과 절제, 철학까지 담아냈다.
그 정신은 오늘날 ‘장계향 문화체험 교육원’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전통 한옥으로 구성된 교육원은 단순한 전시공간이 아니다. 이곳에서는 장계향 선생의 생애를 소개하는 전시와 함께, 그녀가 남긴 ‘음식디미방’의 레시피를 바탕으로 한 조선식 전통 음식을 직접 만들고, 먹고, 배울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수증계(찜닭), 석류탕(육고기탕), 섭산삼(버섯 삼계탕), 어만두(생선 만두) 등 조선시대의 건강하고 절제된 음식들은 미각은 물론 정신까지 정화시킨다. 이 음식들은 단지 ‘맛있는 요리’가 아니라, 재료를 아끼고 자연을 존중했던 조상의 슬기로운 삶이 고스란히 담긴 미식문화유산이다.
음식 체험 외에도 전통주 만들기, 다도 예절, 전통놀이, 한복 입기 체험 등 현대인들에게 생소해진 한국 고유의 생활문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콘텐츠가 준비돼 있다. 매주 주말이면 가족 단위의 관광객, 도시에서 휴식을 찾는 중년층, 문화에 관심 많은 외국인 방문객들이 삼삼오오 이곳을 찾는다.
밤이 되면 한옥에 불이 하나둘 켜지고, 마당에는 풀벌레 소리가 맴돈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과거의 시간을 온몸으로 느끼며 잠드는 경험은 단순한 ‘숙박’을 넘어선 감동을 준다. 도시에서 잊고 살았던 정적(靜寂)과 여백의 미가 이곳에서는 사치가 아닌 일상이 된다.
이처럼 두들마을은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한국 전통문화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오롯이 품은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외국인들에게는 한국의 깊은 뿌리를 알리는 공간이고, 한국인들에게는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곳이다.
오도창 영양군수는 “두들마을은 한국 음식문화의 정수를 간직한 마을이자, 일상의 쉼을 선물해주는 곳”이라며, “과거와 현재가 조화를 이루는 이곳에서 우리의 뿌리를 맛보고, 정서를 회복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무더운 여름, 여행이 단지 휴식이 아니라 ‘회복’과 ‘사색’이 되기를 바란다면 두들을 찾아보자. 음식디미방의 정신이 살아 있는 두들마을에서 당신은 시간의 결을 맛보고, 마음의 여백을 채우게 될 것이다.
일상에 지친 당신을 위한, 가장 한국적인 미식 인문학 여행이 지금 이 순간, 두들에서 시작되고 있다.
/장유수기자 jang7775@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