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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형태

등록일 2025-02-03 19:09 게재일 2025-02-0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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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언스플래쉬
집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언스플래쉬

이번 설엔 본가에 내려 갔다 왔다. 내 본가는 전라남도 목포에서 11km 떨어진 영암으로, 현대삼호중공업 옆에 위치한 작은 사원 아파트다. 서울 용산역에서 ktx 열차를 타고 두시간 반, 그리고 차를 타고 삼십여분 더 들어가야 하는 거리. 지금 살고 있는 서울 자취방에서 출발한다면 총 세시간은 너끈히 걸리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쉽게 먹어지지 않는 터라 자주 내려 가지 않지만, 이번 명절엔 꼭 내려오라는 부모님의 안부 전화에 나와 동생들은 어쩔 수 없이 집을 내려가게 되었다.

2년여만에 찾은 집, 집 또한 나이를 먹는 탓인지 세월의 흔적이 집 곳곳에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깔끔한 성격의 어머니가 잘 닦고 관리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욕실 문이 낡았다던가 하얗던 안방 벽지가 누렇게 변색되어 있는 등의 흔적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젠 부모님의 드레스룸으로 변한, 내가 쓰던 방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집이 얼마나 포근하고 안락한 지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어린 날에 새긴 나만 아는 낙서 자국들이라던가, 베란다 벽면에 붙어 그대로 시멘트처럼 굳어버린 껌 등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그 순간 타지에서 지니고 있던 모든 긴장감들, 가슴 한 가운데에 얹혀 있던 책임감과 답답했던 모든 것들이 몸 아래로 묵직하게 내려갔다.

동시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몸의 불필요한 힘들을 내보낼 수 있게 되었고,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어떠한 소음을 내지 않으면,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아주 조용한 시골. 새 소리와 닭 소리와 창문을 열면 간간히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몸을 맡기고 정말 오랜 만에 진정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집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정리정돈이 깔끔한 탓에 이 년 만에 찾은 집이지만 필요한 물건을 한 번에 잘 찾을 수 있고, 방마다 좋은 냄새가 나며, 풍부한 식재료, 건강하게 만들어 먹는 집밥, 오랜만에 얼굴을 보며 나누는 대화 등.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안전한 요새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퍽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작은 거실에 둘러 앉은 우리 다섯 명의 식구를 보며 다시금, 우리는 어떤 지점에서 서로 상처를 받는지, 어떤 특정 말투와 뉘앙스에 불편함을 느끼는 지에 대해 다시금 알게 되었다. 오랜 시간부터 함께해온 가족이기에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쉽게 느끼지만 그만큼 연약하고 불안정하고 완전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종종 서로에게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입힌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간섭을 하고, 관여를 하고, 어느 때엔 또는 지나치게 방관한다. 부모님은 날이 갈수록 세월의 흔적이 얼굴과 몸에 고스란히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여전하시고 나와 동생들은 계속해서 어리기만 한다. 부모님은 우리가 자식으로서의 기대감과 의무를 늘 생각하시며 바라고, 나와 동생들은 늘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한 채 어리둥절해 있거나 또는 무의미한 반항을 계속 한다.

집에 머무른지 삼일 차가 되면 화기애애하던 우리의 관계는 또다시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의뭉스러운 사랑의 형태. 또다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언행과 불필요한 행동 등은 어딘가 삐뚤삐둘한 날이 잔뜩 서서 서로를 찌르기 바쁘다. 다시금 처음부터 옳은 방향으로 되돌리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대화의 내용으로 결국 또 서로에게 무안함을 주기 위해 불같은 싸움이 던져지지만 민망하게도 다시금 쉽게 식고 만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값비싸고 좋은 음식 앞에선 다시 서로의 앞접시에 음식을 덜어주고, 좋은 부위의 고기를 내어주며, 집에 있는 신선한 식재료를 내 가방에 넣어주고, 간간히 나의 안녕과 건강을 빌어주는 부모님의 말에는 또다시 진실된 사랑을 느낀다. 어딘가 서툴고 이상하고 요란하지만 어찌됐든 존재하는 사랑의 형태. 너무 어설퍼서 가까이에 갈 때마다 서로의 가시로 마음을 쿡 쿡 찔러대고 나는 한 번 찔린 가시에 또다시 지나친 엄살을 부리지만 그래도, 이 순간이 있어 타지에서의 삶의 원동력이 생기고, 다시금 출근을 하며, 내 생활과 나를 보살 필 수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무엇이든 늦은 때는 없다. 일도, 꿈도, 사랑도 지금 내가 원하는 때가 있다면 결코 늦은 때란 없다. 그러니 이 의아한 사랑의 형태 속에서 더는 의문스러워한다거나 주저하지 않는다. 가족의 사랑, 부모님의 어설픈 사랑을 인정하며 솔직해질수록 내 삶의 원동력은 더욱 선명해지고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시금 용산에서 서울 자취방으로 가는 지하철 안이었다. 수시로 변하는 창문에서 쓸쓸히 웃고 있는 나의 표정의 언뜻 비쳤다. 올해도 열심히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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