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반도는 동으로 서쪽으로 끊임없는 수백, 수천 번 외적의 침략으로 전쟁에 시달린 반도이자, 지금도 수많은 민족이 뒤섞인 까닭이요, 끈질긴 생명력을 잃지 않는 강인한 민족들의 땅이다. 우리네 한반도와 비슷한 슬픔을 지닌 땅이다.
코소보전투에서 승리한 바예지드 1세가 술탄의 자리에 오른다. 여세를 몰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 이때 헝가리와 스위스 연합, 제노바공국,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베네치아까지 합세해 마지막 대규모 십자군, ‘니코폴리스 십자군’이 결성된다.
1396년 9월, 드디어 헝가리 도나우강가 니코폴리스에서 두 군사가 맞붙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도 바예지드 1세가 승리를 거두면서 세계를 향해 성전의 선봉임을 과시했고, 하늘에 자랑했다. 그러나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다. 성공이 실패를 초래하는 결정적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알바니아를 버스로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오금을 저릴 만큼 험준한 산악지형에 아연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알바니아 모레아 같은 험준한 산악지대가 넓게 형성된 곳은 이슬람의 힘이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바예지드 1세는 그냥 두지 않았다. 무리한 군사적 행동은 역풍을 감당해야 했다. 발칸반도에 술탄의 신하로서 복종하고 고개 숙이는 에니체리가 이슬람이 아니라 기독교도거나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군인이었다. 비(非) 무슬림으로 구성된 기독교계 직업군인을 이용해 무슬림과 투르크 인을 상대로 살육을 자행했던 것이다. 이는 토후국은 물론, 백성의 분노를 샀다. 성전, 전사의 원정대로선 이상과 신앙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이 일은 훗날 오스만제국으로서도 재앙으로 작용한다.
이때였다. 1402년이 되자 세계사에 가혹한 정복자로 알려진 티무르가 등장한다. 현재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서정(西征)한 티무르와 대결은 피할 수 없었다. 티무르, 위대한 약탈자, 폭력의 화신, 단 한 번도 전쟁에서 패하지 않은 무적의 사나이였다. 그가 지나간 자리는 비옥한 땅일지라도 풀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평야는 불모지로 변했다. 남녀노소 죽이는 것을 파리 목숨과 같이 여겼다. 사람의 머리로 탑을 쌓았다니 그저 할 말을 잊는다. 진정 악의 화신이라 해도 좋았다.
“…. 화려했던 바그다드는 폐허로 남았다. 사원도, 기도하는 신자도 볼 수 없다. 나무들은 메마르고 수로는 막혀 기능하지 못했다. 도시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가혹한 모습이다.”
티무르에 침략당한 지 35년이 지난 후 이집트의 모 역사가가 기록한 바그다드 모습이다. 티무르는 오아시스를 주변으로 독자적인 이슬람이 번지면서 자연적으로 스며든 이슬람을 받아들인 경우다. 14세기 후반, 사마르칸트 등 중앙아시아의 비옥한 땅을 평정하고 30여 년에 걸친 정복 사업은 살육을 동반한 가공할 만한 업적을 이룬다. 북쪽의 러시아국경에 걸쳐있고, 남쪽으로는 인도, 동쪽으로는 중국변방까지, 서쪽으로 타슈켄트, 테헤란, 앙카라까지 영역을 넓혔다. 그리고 서진을 이어가 소아시아에 도착해 오스만제국과 대치한다.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있던 바예지드 1세는 급하게 동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무적의 이슬람군도 티무르에게는 어림없었다.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바예지드 1세가 지배한 토후국 지도자 중 일부가 오스만제국을 배신하고 티무르에게 붙었던 것이다. 비(非) 이슬람군으로 이슬람교도, 혹은 튀르크족을 죽이는 전쟁에 성전이란 이름으로 동조할 수 없었다. 그러자 승패는 불 보듯 뻔했다. 세기의 패자 오스만제국도 티무르 앞에선 맥을 추지 못했다. 이 전투에서 ‘번개왕’ 바예지드 1세가 포로로 잡힌다. 수치심에 분노를 감출 수 없었던 1402년, 그는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거뒀다. 그리고 화려한 문화를 향유했던 바그다드는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이때 세르비아 출신 에니체리들이 바예지드 1세를 위해 결사 항전했다고 전한다. 충성심을 잘만 심어 놓으면 이처럼 엄청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각설, 오스만제국을 점령한 티무르는 욕망에 불탄 나머지 역사적 오판을 범한다. 오스만제국으로서는 이만한 다행히 없었지만, 제국을 완전히 무너트리지 않았다. 오스만 군사를 유럽 침략에 선봉을 세우려는 티무르의 욕심이었다. 서구인으로선 천만다행한 일이 또 벌어졌다. 1402년 티무르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명나라를 치기 위해 사마르칸트로 향했다. 세계의 패자가 두 명이 될 수는 없다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는 티무르와 일전을 준비했으나 다행(?)히도 무위에 그쳤다. 티무르가 진군 도중 졸지에 열병에 걸려 죽었기 때문이다. 그이 나이 69세였다. 죽음을 앞두고서도 명나라에 대한 원정을 멈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역사적 가정, 즉 히스토리 이프(History if)란 말이 있다. 만약 영락제와 티무르의 한판 대결이 성사되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한반도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스토리텔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