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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토마토

등록일 2024-05-06 18:18 게재일 2024-05-07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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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슬픔 끝엔 정말 복이 있을까? /언스플래쉬

집 냉장고엔 토마토가 가득 쌓여 있다. 후덥지근한 한낮, 창문을 열어두고 커튼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토마토를 먹는 건, 내게 초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토마토는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설탕과 물을 넣어 간 토마토 주스도 좋고, 알룰로스 시럽과 설탕을 토마토 위에 솔솔 뿌린 토마토 무침, 또는 사이다에 토마토와 바질을 넣어 숙성 시켜 마시는 토마토바질 에이드를 만들어 먹어도 좋다. 간식은 물론 계란과 토마토, 약간의 소금 후추를 넣어 금세 만들어 내는 토마토 계란 볶음, 발사믹 소스로 절여 만드는 토마토 마리네이드까지 근사한 식사로도 활용해 먹을 수 있으니 이맘때의 토마토는 냉장고에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초여름이 되면 어쩐지 어린 이파리가 몸속에 자라는 듯 파릇한 기운이 돈다. 연두빛을 띄던 식물들이 점점 초록색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왠지 나도 따라 마음이 짙어 진달까. 마음의 여린 부분을 쥐고 하늘하늘 흔들리다 외부 충격에 휘청일 때면 달콤한 토마토로 기분을 달랜다.

초여름의 토마토의 맛은 달콤하기보단 새콤함에 가깝다. 토마토를 반달 모양으로 조각내어 한 입에 넣고, 단단한 과육이 물러질 때까지 꼭꼭 씹으면 토마토의 새콤한 향이 입 안에 퍼진다. 달콤함과 약간의 짠 맛이 혀에 감도며 감칠맛을 이끌어 낸다. 연한 속살은 씹을수록 시큼함과 함께 풀내음이 난다. 연하게 맴도는 풀내음 덕에 더욱 초여름과 어울린달까.

토마토를 더 맛있게 먹기 위한 방법으로는 하루 1시간씩은 달리기를 꼭 하는 것이다. 사실 겨울 내내 추위를 핑계로 운동을 미뤄왔지만 근래 들어선 주에 4번씩은 기본으로 하고 있다. 운동이라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무작정 런닝 머신에 올라가 뛰는 게 전부지만, 외투가 젖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뜀박질을 하고 나면 토마토가 맛은 더욱 배가 된다.

한 시간 내내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동력 또한 토마토에서 나온다. 미운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분노의 질주를 택하기보단, 십오분 뒤 차가운 토마토 먹는 것을 떠올리며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달리는 편이 효과가 좋다. 화끈화끈해진 얼굴을 감싸 안으며 집에 돌아와 찬물로 씻고 먹는 토마토의 맛이란! 이제 막 냉장고에서 꺼낸 달콤한 토마토의 맛은 다시금 세상을 너그럽게 살아갈 수 있는 동글동글한 마음가짐을 갖게 한다.

요즘 루틴 중 하나는 자기 전, 감사 일기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하루를 돌아보면 작고 소소한 감사한 것들이 많은데, 자꾸만 부정적인 몇몇 가지의 이유에 치여 감사함을 잊고 지낸다. 부정적인 이유를 커다랗게 생각하여 하루의 끝에 침울해 있기 보다는, 전력 질주 후 토마토를 먹는 것과 같이 소소하게 이루어 내는 작은 행복들에 집중하며 일기를 쓴다.

일기를 쓰면서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잘 흘러가고 있고, 무례한 사람에게는 무례함을 똑같이 되갚아 주지 않아도 되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있다. 의외로 생각 정리가 잘 되어서 요즘 기록하는 습관의 힘에 대해 다시금 놀라고 있다.

지금은 해가 들어오는 시간, 식물을 황급히 창문 앞에 두어 빛을 받게 하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잎을 슬쩍 본다. 지금 집 안엔 그리 시끄럽지 않은 음악이 떠다니고, 바깥은 간간이 들려오는 차 소리 이외에 큰 소음이 없어 적적한 기분이 든다. 이 시간 불쑥 찾아오는 외로움은 늘 반갑지 않은 손님이지만 그래도 그 외로움 끝에 단단한 힘이 있음을 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불현듯 성경책의 등을 쓰다듬다 윤동주 시인의 ‘팔복’을 떠올린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문장의 행이 8번 반복되고,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라는 문장으로 마무리 되는 시. 외로움은 슬픔을 동반하고 슬픔을 멀리 하려 할수록 그림자와 같이 더는 도망갈 수 없다. 피부 깊이 새겨진 외로움을 속옷처럼 입혀진 상태로, 더 내밀해진 영원의 슬픔으로 향한다.

영원의 슬픔 끝엔 정말 복이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내게 누군가는 기도를 해보라고, 또다른 누군가는 나를 측연하게 여기며 위로를 건네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나를 알 수 없는 허공의 눈동자로 물끄러미 보기도 한다. 그 누구도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하지만, 생과 외로움이라는 거대함에 대해 더 생각하기보단 지금 당장 일어서서 생생한 감각으로 달리고, 기록하고, 토마토를 먹으며 순간의 즐거움에 집중하는 것이 지금 내게 큰 도움이 되는 일임을 안다.

짙은 초록과 열기로 들끓는 계절, 여름이 와도 붉게 익은 한 알의 토마토처럼 단단해지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얗고 깨끗한 집,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먹는 토마토의 맛, 식물과 함께 나란히 광합성을 하며 오월의 시간을 느리게 느리게 되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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