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동그란 사랑

등록일 2024-04-22 19:21 게재일 2024-04-23 17면
스크랩버튼
혼자 사는 집의 동거인이 된 반려 식물.
혼자 사는 집의 동거인이 된 반려 식물.

혼자 살던 집에 동거인들이 생겼다. 바로 작고 작은 반려 식물들이! 하나 둘 씩 모으던 식물이 점차 수를 늘려가며 벌써 다섯이 되었다.

집안일을 다 끝낸 무료한 주말엔 집 근처 식물 가게에 간다. 처음엔 분명 구경을 하러 가는 것이지만 왜인지 나올 땐 식물이 하나씩 손에 들려 있다. 아마 식물 가게 주인의 엄청난 영업 실력 덕분이지 않을까.

내가 제일 처음에 들인 식물은 스파티필름이다. 어린잎이 하나둘씩 자라더니 갓 파마를 마친 할머니 머리처럼 바글바글 풍성해졌다. 현재는 꽃차례에 하얀 불염포를 피우고 있는데 얼마나 기특한지 모른다. 어린 아이의 말랑한 손가락을 보는 것만 같아 신기하고 설렌달까.

그 뒤로 들인 식물은 아스파라거스 나누스, 홍콩야자, 스킨답서스 실버리안이다. 아스파라거스 나누스는 솜털 같은 형태의 보송하고 가느다란 잎을 머리카락처럼 길게 늘어뜨리고, 홍콩야자는 우산 모양의 초록 잎이 길게 자란다. 그 중 애정하는 스킨답서스 실버리안은 벨벳 재질 형태의 잎과 은은한 실버 색상이 눈에 띄는 독특한 식물이다. 다행히 세 식물 다 우리 집 환경이 잘 맞는지 어린잎을 계속해서 내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내가 보지 않는 시간에도 반짝반짝 잘 자라 나를 놀라게 하는 것, 이게 바로 식물을 애정으로 키우게 되는 이유이지 않을까.

가장 최근에 데려왔지만 골머리를 앓게 하는 녀석은 유주나무다. 작은 귤과 흰 꽃이 달리는 과실나무라 계속해서 벌레가 꼬이는데다 햇빛 양이나 물주기가 잘못된 탓인지 살짝 건들기만 해도 잎이 우수수 덜어진다. 힘없이 축 늘어진 잎을 보면 얼마나 눈길이 가는지. 영양제도 꽂아보고 뿌리 파리 벌레를 물리치는 트랩이나 각종 약을 뿌려도 오히려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집이라 겨우 빛이 집 안에 드는 시간대면 유주나무의 자리를 빛이 드는 곳으로 옮겨 둔다. 인터넷 글을 보니 누군가는 이년 내내 아픈 유주나무를 보살피다 어느 샌가 기적처럼 살아났다고 하던데, 넉넉한 시간은 물론 정성과 관심이 없으면 참 어려운 일이다.

앞 식물과는 달리 유주나무는 돌봄 난이도가 있는 편이라 하루라도 빛과 바람, 물주기를 신경써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시들해진다. 조금만 눈을 떼면 금방이라도 죽기 쉬운 식물이라 참 애간장을 녹이는데, 또 작은 귤 열매가 새롭게 맺힌 것을 볼 때마다 만 평 대지에 흉년이 든 것처럼 기쁘다. 아직 초보 식집사라 그런지 내게 유주나무는 아픈 손가락이지만 그래도 요즘 나를 바삐 움직이게 도와주는 고마운 존재랄까.

일주일에 한 번, 물주기가 비슷한 식물을 모아 잎에 쌓인 먼지를 닦아 내고 흙이 흘러내리지 않게 천천히 물을 준다. 이제 막 물을 주어 싱그러운 식물을 따라 편안하고 천천히 호흡해본다. 조금씩 시간이 느려지고 상기되었던 얼굴도 누그러진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그러다 최근 갑작스레 돌아가신 지인분이 불현듯 떠올랐다. 짐을 정리하다 우연히 그의 메모장을 본 적 있었는데, 그곳엔 온통 불교 경전의 말씀이 가득했다. 필사는 왜인지 긴박히 서두르는 듯 보였고, 특이하게도 ‘ㅇ’ 모음마다 빨간색 동그라미가 덧대어 그려져 있었다. 왜 ‘ㅇ’일까.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고 또는 아무 이유도 없을 수 있겠으나 빨간색 동그라미를 그려내며 각지고 날카롭고 뾰족한 마음을 둥글고 부드럽게 다듬고 싶었던 걸까.

동그라미의 틀, 동그란 잎의 식물들, 둥그런 화분의 입구, 동그란 유주나무의 열매, 둥글둥글해지는 마음. 시계를 보니 아직 오후 세시 정도였고, 일요일의 오후가 조금 더 남았다는 것에 안심하며 끼니를 챙겨 먹기 위해 천천히 일어섰다.

조금씩 빛이 드는 자리에 앉아 마음의 파동을 일으키는 대상을 가만히 생각해보는 것이 내겐 사랑이고, 이 사랑으로 채워진 시간이 오롯이 내 마음을 평온하게 함을 안다.

평온함의 오후, 물 빠진 식물은 다시금 제자리에 돌려놓고 유주나무는 한 번 더 벌레가 기어 다니지는 않는지 체크한 뒤 놓아준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내내 눈길이 가고, 떨어져 있을 때면 지금은 무얼 하고 있는지, 괜찮은 건지 생각하며 저릿하고도 무력한 마음 같은 것이 나는, 사랑이라 믿는다.

2030, 우리가 만난 세상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