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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못된 일을 하자

등록일 2024-04-15 18:19 게재일 2024-04-1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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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는 조그만 생명이 주는 기쁨을 느끼게 한다. /언스플래쉬
아기는 조그만 생명이 주는 기쁨을 느끼게 한다. /언스플래쉬

최근 내 삶에 생긴 몇 가지 변화가 있다. 그중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건 단연 조카의 탄생이다. 조카가 태어난 날을 기점으로 우리 가족의 결속력은 단단해졌다.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주고받고 조카의 집에 다함께 모여 시간을 갖는 일도 잦다. 처음에는 아이를 안아 드는 것도 버거웠지만 이젠 여러 일에 제법 능숙해졌다. 밥을 먹이고 옷을 갈아입히는 건 기본. 쏟아지는 졸음에 칭얼대는 것과 먹을 것을 요구하는 소리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 팔이 떨어질 것같이 아프다가도 내 품에서 잠든 아기의 체온에 마음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아, 이토록 조그만 생명이 주는 기쁨이란!

세게 움켜쥐면 바스러질 것같이 조그만 아기였다. 언제부턴가 몸을 뒤집더니 배밀이를 하고 이젠 네 발로 온 집안을 헤집는다. 목도 가누지 못하던 날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는 듯 꼿꼿하게 앉아 무거운 물건을 쥐고 흔들기도 한다. 한 생명의 뼈가 단단해지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노라면 시간이 흐른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이 실감 난다. 자란 것은 육체뿐만이 아니다. 우리 아기 어디 있지? 장난을 치면 몸을 배배 꼬면서 자기 몸 위에 손을 얹는다. 어찌나 영특하고 귀여운지. 바라보고만 있어도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

고모인 내가 봐도 이렇게 예쁜데 부모는 오죽하겠는가. 자신들의 아이를 누구보다 잘 키우고 싶다는 부모의 열정이란 실로 대단해서 옆에서 보고 있자면 머리가 아득할 지경이다. 숙지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고 반드시 해야 할 것과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도 무궁무진하다. 나 때는 그런 거 없었는데,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면 혀를 꾹 깨문다. 나도 모르게 기성의 문법이 불쑥 솟아오르는 나날이다. 오지랖 넓은 우려가 들 때도 있다. 서울 한복판의 높다란 건물에서 태어난 아이가 지겹도록 볼 것들과 끝내 보지 못할 것에 관해 생각하다 보면 더욱 그렇다. 창의성을 길러준다는 태블릿보다 더욱 중요한 게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 또한 낭만적인 감상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이를 향한 부모의 열렬한 사랑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어느 주말, 아빠에게서 연락 한 통이 왔다. ‘우리 못된 일을 할 거야.’ 연이어 조카의 사진이 도착했다. 노란 옷을 입고 지하철을 탄 모습이었다. 늘 그랬듯 집 근처의 대형 쇼핑몰로 산책을 가려다가 인천으로 노선을 틀었다고 했다. 이유는 다름 아닌 갈매기 때문. 수족관 앞에 놓인 모형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진짜 갈매기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오빠와 새언니의 눈을 피해 조카를 데리고 지하철에 올라타는 아빠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니 웃음이 났다. 그야말로 불량 할아버지와 손자가 아닌가. 주먹을 꾹 쥔 채 앉아 있는 사진 속 조카가 너무나 의젓하고 결연함까지 느껴지는 바람에 나도 그 일탈에 기꺼이 동참하기로 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렇게 도착한 포구는 꽤 부산스러웠다. 흥성거리는 불빛과 색소폰 연주가 어지럽게 뒤엉킨 저녁이었다. 조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갈매기가 하늘 높이 날아가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수산시장에 들러 도다리회를 떴다. 노래미와 멍게까지 서비스로 받았다. 우리는 회에 소주를, 조카는 이유식을 먹었다. 조카의 오동통한 볼을 꼬집으면서 말했다. “너희 엄마 아빠가 알면 엄청나게 혼날걸? 위생적이지 못하다거나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랬느냐고 한참 잔소리 들을 거야.” 키득거리면서 내가 했던 많은 못된 일을 떠올렸다.

어른들이 절대 가지 말라던 위험한 동네를 배회하던 일이나 엄마 몰래 불량식품을 숨겨 놓고 야금야금 까먹던 일. 조마조마하고 무서우면서도 얼마나 신났던가. 나의 조카 역시 무수하게 많은 못된 일을 행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이상하게 기분이 들떴다.

잠든 아기의 뒤통수는 동그란 행성 같다. 망망한 우주를 떠돌다 우연히 발견된 어떤 별. 부지불식간에 나타난 이 존재는 내 삶을 대차게 뒤흔들었다. 아이는 걷고 뛰고 말하고 생각하며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테다. 그러다 거꾸로 걷고 싶은 날도 있겠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멈춰있을 때도 있을 것이고. 그게 나쁘다면 가끔은 나쁜 아이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조만간 우리 또 못된 일을 하자. 잠든 조카의 귓속에 속삭인다. 언젠가 반드시 혼날지언정,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비밀스러운 일을 도모하는 친구가 되겠노라고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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