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다르게 태양이 일찍 떠올라 창천에서 오래 빛난다. 아침 여섯 시 무렵 동창은 환하게 빛나기 시작하고, 저녁 일곱 시가 지나야 사방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생명의 환희와 약동(躍動)이 찬란하게 작동하는 눈부신 시절이다. 이런 날이 이어지면 누구나 들뜨고 조금은 흥분되기 마련이다. 접촉사고에 조심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반면에 봄날은 아주 변덕스러워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이를테면 지난 목요일 내가 사는 고장 청도에는 온종일 비가 뿌렸다. 아침나절부터 오기 시작한 비가 한밤중까지 그칠 줄 모르는 것이다. 결국 그날 온종일 나는 잠과 벗하는 선택 말고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러하되, 대체 얼마나 많은 비가 내렸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기상청도 민간 기상업체도 묵묵부답이다.
그러다 금요일 아침나절에 피식, 하고 혼자 웃는다. 일일 누적 강수량 41.8mm라는 표기가 일기예보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정보가 차고 넘치는 때에 이토록 늦게 강수량 표기를 한다는 사실이 좀체 납득(納得)하기 어렵다. 나처럼 수량(數量)으로 현상을 이해하는 인간에게 가장 요긴한 것은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보이기 때문이다.
금요일 아침 경북대 교정에는 기다리던 반가운 손님이 단체로 몰려들었다. 하얗고 발그스레한 벚꽃이 무더기로 하늘을 향해 몸을 연 것이다. 그것도 맹렬한 봄바람의 기세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무더기 개화를 시작한 게다. 매몰차게 불어닥치는 바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화사하게 꽃잎을 열어젖힌 봄의 무수한 전령이 일제히 고함치는 장면은 실로 장관이다.
온종일 비가 내려 두문불출(杜門不出)해야 했던 어제와 찬연(燦然)한 하늘과 드센 바람과 놀라운 개화가 공존하는 오늘의 차이를 현저하게 실감하는 실존의 봄날! 어쩌면 이런 까닭에 인간은 죽음을 경원하고, 생의 마지막 그날까지 살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삶을 향한 끈질긴 소망은 또 얼마나 처연한 것인가?!
플라톤이 남긴 ‘소크라테스의 변론’ 말미(末尾)에 독배를 마셔야 하는 소크라테스의 소회가 눈길을 잡는다. “이제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나는 죽으러 가야 하고, 여러분은 살러 가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과 나 가운데 누가 더 축복받은 것인지는 오직 신만이 아실 것입니다.” 이 대목은 대단한 무게로 우리를 덮쳐온다.
누구나 삶이 죽음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라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달리 생각한다. 그는 신의 가호를 받는 인간에게는 삶도 죽음도 차이가 없다고 확언한다. 죽음은 아주 깊은 잠을 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1601년의 햄릿의 독백을 그는 기원전 399년에 이미 선취(先取)하고 있다.
어제를 어제로 보내고, 오늘은 오늘로 맞이하는, 삶은 어제로 보내고, 오늘은 삶이 아닌 죽음과 대면하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아니하는 소크라테스. 그에게는 이토록 화려하고 눈물겨운 봄날이 북풍한설 몰아치는 겨울과 다르지 않은가 보다. 하되, 어쩔 것인가, 이 찬란한 봄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