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갑자 중 오십다섯 번째는 무오(戊午)다. 천간(天干)의 무토(戊土)는 황토색을 가진 높은 산이다. 지지(地支)의 오화(午火)는 봉화대의 횃불 같다. 동물로는 누런 말이다.
무오일주는 뜨거운 용암을 품고 있는 화산의 물상이다. 겉으로 보기에 침착한 선비의 모습이다. 마음속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불안정함을 가지고 있다. 생각이 많아 복잡한 내면의 소유자다. 우직하고 자존심이 강하지만, 변덕스럽지는 않다. 자신의 감정을 숨길 줄 모르며, 거짓말은 하지 않는 편이다.
친구를 좋아하며 신용과 의리를 중요시 여긴다. 허나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호불호가 분명하여 타인에게 미움을 사기도 한다. 겉으로 보면 속이 드러나지 않아 우직한 곰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두뇌 회전이 빠르다. 또한 스태미나가 넘치기에 운동선수를 하거나 취미로 운동을 하면 좋다.
장점으로는 독립심과 자존심이 남다르고 강건한 기상으로 카리스마와 부드러움을 갖춘 지도자 모습이다. 주어진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감 있어 일을 추진할 때 지속 능력이 좋지만, 주변 사람들과 갈등과 고통이 수반된다. 그렇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해결능력이 탁월해 잘 대처하며, 주변 사람들도 도와주는 타입이다. 하지만 강압적이고 독단적이며 폭력적인 이중적 모습도 보여준다.
미국의 소설가 존 스타인벡(1902∼1968)이 1939년에 발표한 ‘분노의 포도’가 있다. 1929년에 경제대공황이 시작되고 미국 중부에는 극심한 가뭄과 모래폭풍이 덮친다. 옥수수 농사를 망친 가난한 농민들의 삶을 보여준다. 경제 파탄과 자연재해에서 트랙터가 인간의 일을 대신하여 저소득층은 실업자로 전락하고 만다.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야기의 주인공 톰 조드는 실수로 살인하여 4년을 복역한 뒤 가석방 된다. 돌아오는 도중에 어릴 때 목사였던 케이시를 만나 동행하면서 고향의 소식을 듣는다. 집은 가뭄과 은행 빚에 의해 쫓겨나기 직전이다. 구직광고를 보고 낙원의 땅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로 결정한다. 케이시도 함께한다.
오클라호마에서 캘리포니아까지는 수 천 킬로미터가 되는 먼 길이었다. 서부로 가는 인파 행렬 속에서 조부모가 세상을 뜨고 톰의 형과 임신한 여동생의 남편이 자기 살 길을 찾아 사라져 버린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가족들은 막연한 기대를 품고 캘리포니아에 도착한다.
거기도 일하려는 사람은 많고, 기업화된 농장들은 담합해서 임금이 턱없이 낮아져 있다. 굶주린 아이들은 병들어 가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결국 노동력 착취에 반발해 노동자들은 조합에 합류하기 시작하고, 파업을 이끌던 케이시가 삽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톰 역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어 가족 곁을 떠나게 된다.
작가는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간다’라고 쓰고 있다. 톰의 어머니는 모든 것을 잃더라도 가족만은 잃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가난에 허덕이며 절망하면서도 끝까지 인간의 존엄성만은 놓지 않으려 애쓴다. 소외 받는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깨닫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고 앞장서 싸울 사람으로 성장해 나간다. 희망의 가능성은 여전히 공동체, 즉 가족에게 있음을 톰의 어머니를 통해 보여 주고 있다.
무오일주 여자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활발한 활동성을 가지며 일의 추진력이 좋아 여장부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본인이 잘 꾸미기도 하지만, 배우자의 외모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남자는 겉으로 보면 마초 같은 모습과는 달리 알뜰하게 챙기는 성향이 있다. 미인과 인연이 많아 연애를 잘하는 편이다. 공명심이 있어 쓸 필요가 없는 곳에 돈을 쓰기도 한다. 남녀 공히 성적 유혹에 빠질 위험성이 있어 자신을 다스리는데 노력할 필요가 있다.
무오일주는 만물의 생명력이 깃든 광활한 땅의 이미지를 하고 있고,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의 모습이다. 말이 하늘의 기운이 가장 무성한 무(戊)를 만났으니 조화롭고 활기찬 기운이다. 마치 큰 산 위를 뛰어 달리는 말과 같다. 진취적이고 정열적이며 화끈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야생마 같은 물상으로 어디에 구속되기보다는 자유 분방함을 즐긴다.
또한 말은 깔끔한 동물이다. 발정도 일 년에 한 번만 하고, 인공수정도 안 된다. 그런데 말이 문제가 좀 있다. 우리가 머리 나쁜 사람을 보고 ‘말대가리’라고 하는데, 이 말은 주인을 몰라본다는 것이다. 그냥 올라타는 놈이 주인이다.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다. 미래나 과거가 아닌 현재에 충실하다. 어떤 규격이나 틀도 없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각종 제약에서 벗어나는 성향이다. 하지만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한 힘과 정열을 어디에 쓰느냐가 관건이다.
조선시대에 4대 사화(士禍)가 있다. 첫 번째가 무오사화다. 1498년(연산군 8년) 무오년에 벌어진 일이다.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단종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이라는 이유로 훈구세력이 사림의 대표 김종직 일파를 처단한 사건이다. 김일손은 처형되고, 그의 스승이었던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했다.
권력 다툼에는 항상 피 냄새가 난다. 훈구파를 비판하며 등장한 세력이 사림파다. 권력을 뺏기 위해 지키기 위해서는 반대파를 숙청하는 일이다. 김일손은 춘추의 필법으로 사관의 책무를 지키기 위해 목숨도 마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선은 특별히 명분을 중시하는 사회였다. ‘선비를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라는 말은 체통과 명분을 중시했던 사회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처리하고 있다. 명분이 정의롭다면 그들의 도덕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과연 시행자들은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는 사람일까라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불의와 부당함에 분노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침묵하면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