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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짐 지고 고개 넘던 보부상의 흔적을 따라 가다

류중천 시민기자
등록일 2023-05-30 19:15 게재일 2023-05-31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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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의 흔적을 찾아 답사를 떠난 봉화 보부상 보존연구회.
잊혀져가는 조선시대의 봉화 상무사의 문화 유적을 찾아 ‘봉화 보부상 보존연구회’ 회원들이 지난 11일 열두 고갯길(십이령)을 찾았다.

십이령은 봉화-울진간 열두 고갯길을 말한다. 봉화에서 다섯 고개, 울진 일곱 고개를 일컫는 말이다. 봉화 보부상은 봉화와 울진시장의 상권을 관리했던 단체로 1860년대부터 내성행상단으로 활동하다가 1899년에는 봉화 상무사로 활동했다.


1866년 보부청을 설치해 전국의 보부상들을 통합했고, 1883년 혜상공국을 설치해 행상 또는 보부상으로 칭하게 되었다. 이는 각 도의 관찰사가 관리했다. 이 시기까지는 봉화의 옛 지명 내성 행상단이었으며, 1899년 중앙에서 상무사로 개칭이 된다. 이때 내성행상단이 봉화 상무사로 봉화 보부상은 봉화군과 울진군 2개 군의 권역 시장을 관할·관리했다.


잊혀져 가는 보부상들의 흔적은 충청남도와 경상도 일부 지방에서만 유적이 남아 보존의 가치가 높다. 봉화 보부상의 유적은 십이령 샛재 조령 성황사와 성황사 내 중수기 시재기 등 현판에서 찾을 수 있다.


울진 북면 두천리 ‘내성행상접장정한조불망비’와 ‘내성행상반수권재만불망비’가 있으며, 봉화 물야면 오전리 보부상촌과 위령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십이령 샛재 조령 성황사는 봉화 행상이 세운 성황당으로 선대 보부상들의 제소 역할을 했고, 봉화 보부상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울진 지역은 봉화로 넘어오는 길목으로 봉화 보부상들이 먹고 잘 수 있는 20여 곳의 주막이 있던 곳이다. 울진에서 미역 생선 등 어물을 구입해 모이는 장소였으며, 이곳에서 잠을 자고 아침 일찍 봉화 지역으로 출발하는 기점이기도 했다.


조령 성황사 현판에서 보듯 반수 권재만은 1878년 시재기에 이름이 있으며, 1878년 반수로 1919년 이전 현판에 전공사원으로 기록돼 있다. 또한 1903년 공사원 권재만이 강영원에게 발행한 임명장이 남아 있다.


봉화 춘양장에서 출발해 울진 흥부장까지 십이령 모래재-살피재-막지고개-곧은재-꼬치비재-한나무재-넓재-저진터재-너삼밭재-샛재-바릿재-쇠치재가 이어졌고, 이 길은 160리를 3박4일 동안 등짐을 지고 걸어야 하는 험난한 고갯길이다.


봉화에서 대마·담배·곡물을 울진 해안 지방에 팔고 돌아 올 때는 미역, 소금 생선 등을 구입해 내성장, 장동장, 후평장, 춘양장, 소천장 등에서 판매했다. 십이령을 넘을 때 100여 명, 적을 때는 30여 명이 무리를 지어 다녔고, 십이령 샛재, 두천리, 봉화 소천 자마리, 부내, 곧은재 초입 등에는 주막이 있었다.


봉화 분천역 앞 덕달베리(벼랑길)에는 강으로 추락하지 않도록 쇠말뚝을 심어 잡고 다녔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이번 봉화 상무사 문화유적 답사는 봉화 고유 전통문화를 지키고 보존하는 봉화 보부상 보존연구회의 4번째 답사길이었다. /류중천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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