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좋아하는 냄새가 있다. 나는 바닷바람 냄새와 잔디 깎을 때 나는 냄새가 좋다. 바다를 처음 보았을 때 바다의 드넓은 인상도 좋았지만, 바다가 풍기는 냄새도 잊을 수 없다. 잔디 냄새가 좋다는 생각이 처음 든 것은 베를린 자유대학 동유럽연구소 앞에서였다. 1989년 4월 어느 맑은 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뿜어져 나오던 잔디 냄새는 대단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 큰집에 가면 잔디에서 온종일 뛰어놀 수 있었다. 일 년에 단 하루, 추석 당일에만 허락된 특별한 행사가 잔디에서 공놀이하는 일이었다. 가난했던 나의 아버지와 달리 집안의 기둥이셨던 둘째 큰아버지는 상당한 부를 축적하셨고, 잔디가 심어진 마당 있는 양옥집에서 사셨다. 부자는 부럽지 않았지만, 잔디만은 부럽기 그지없었다.
오랜 세월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다가 몇 년 전 청도로 이사 온 후에 나도 잔디 깔린 집에서 살게 되었다. 전통 한옥에는 마당에 잔디를 심지 않는다. 잔디는 무덤에 심는 것이기에, 마당에는 작은 돌이나 흙으로 처리하는 게 관례였다고 한다. 하지만 양키 문화가 대거 이입되면서 잔디를 심는 집이 부쩍 늘었고, 나도 그 대열에 한몫 끼어든 셈이다.
보기 좋지만 관리가 쉽지 않은 것이 잔디 있는 마당이다. 더욱이 농가에는 사시사철 곳곳에서 온갖 풀씨들이 날아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제멋대로 뿌리를 내린다. 일단 뿌리를 내리고 나면 그들은 수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끝도 없이 피고 지고 또 피어난다. 체면이고 염치고 없는 것들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풀이다.
우리 집 마당에서 해마다 세력을 키워가는 상사화, 붓꽃(아이리스), 낮분홍달맞이꽃, 부추, 돌나물, 자주달개비, 민들레, 씀바귀, 들깨 같은 것들은 어디선가 날아와서 저희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생장한 것이다. 이런 녀석들이 잔디와 함께 자라더니, 급기야 괭이밥, 봄까치꽃(큰개불알풀), 벼룩이자리, 개망초, 달개비(닭의장풀), 개쑥갓 등속도 맹렬하게 세력을 키운다.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급습을 감행하는 풀을 ‘잡초’라 부르지만, 나는 ‘불원초(不願草)’라 부른다. 잡놈은 있어도 잡초는 없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내가 바라지 않았는데 생장하기로 불원초라 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생각이다. 그들은 강인한 생명력과 불굴의 의지로 언제나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결코 중간에 꺾이거나 사라지는 법이 없다.
제초제를 뿌리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손으로 뽑거나, 예초기로 기세를 제압한다. 오늘 저녁에도 잔디를 깎으면서 온갖 풀들의 얼굴과 대면하면서 옛일을 돌이키는 것이다. 그 많던 시공간과 풀과 인연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생각하면 잠시 아득해진다. 돌이킬 수 없이 사라져버린 인연과 사람과 순간과 풀과 꽃들의 행방이 궁금하다.
34년 전 동서독 재통일 직전 흐뭇한 냄새를 선사했던 잔디 깎던 노동자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에게도 봄날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궁금하다. 해마다 봄이 오고, 비가 내리면 잔디를 깎으면서 상념에 젖는 것이다. 아, 세월이여! 추억이여, 인생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