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항일독립운동과 관련 일제에 의해 울릉도에 1년 동안 유배 온 사람이 있어 울릉도가 유배지였다는 사실이 흥미롭고 울릉도 역사의 재조명이 요구된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 김윤배 울릉도독도연구기지대장이 페이스 북에 올린 내용에 따르면 “오당 조재학 선생이 울릉도 1년 동안 유배를 왔다.”라며 “울릉도 개척 이전에 대한 역사도 제대로 조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조재학 선생은 고종으로부터 눈물겨운 호소가 담긴 밀조를 받은 것이 일제 경찰에 의해 발각돼 울릉도로 1년 동안 유배를 오게 됐다는 것. 조선생은 1914년 9월 21일(음력 8월 2일) 울릉도로 유배됐다.
울릉도에서 도동여관에 머물다가 며칠 뒤에 저동 김시언의 집에 머물렀고, 1915년 7월에는 나리동의 박몽암 집에 이주했으며 유배가 해제된 후인 1915년 10월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같은 사실은 조선생의 문집을 모은 ‘국역 오당유고’ 실렸고 울릉도 유배 생활 동안 지으신 약 40여 편의 시와 편지글이 함께 실려 있다는 것이다. 유배 후 1919년 3.1만세운동 참가 및 영남유림이 중심이 된 파리장서에 유림대표로 서명에 참여하기도 했다.
조 선생(1861~1943년)은 경남 의령 출신으로, 면암 최익현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조 선생은 1883년 전국의 유생들과 함께 만인소를 올리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후 대마도에서 최익현 선생님이 순절하자 스승의 장례식를 주도적으로 치르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윤배 대장은 “당연히 조선시대에는 울릉도가 왜구 및 여진족들의 본토 침략 근거지가 된다는 이유로 사람의 거주 자체를 허락하지 않았기에 유배 온 사람이 없겠지만, 1882년 개척령 이후 사람의 거주를 허락했기에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또한 “개척령 이전에도 적어도 100여명의 사람들이 울릉도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며“이분들의 역사 또한 앞으로 제대로 조명이 필요한 부분이다”고 말했다.
또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울릉도독도 연구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오히려 일본 측 자료가 매우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럴 때 일제강점기 울릉도에 유배 온 조재학 선생님의 기록은 매우 소중하다.”라고 말했다.
‘국역 오당유고’에는 조 선생이 쓴 울릉도관련 내용 중 “천년의 우산국에 외로운 조선의 한 나그네 달이 떠오르니 마을에 그림자가 퍼지고 샘물 소리에 바닷물 소리 시끄럽네" (‘여름 밤 만자를 얻다’ 중에서)
"촉대암 아래 물은 푸르고 러일전쟁은 마을 이야기로 전하네. 군대 물품 포장해 모두 엎어 잠기게 하여, 천추에 누가 영걸스런 사나이라고 하였는가." (‘촉대암’중에서)
이 내용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과 교전 중 선체에 파손이 심해 울릉도 저동항 인근에서 1905년 5월29일 침몰한 러시아 발틱 함대 드미트리 돈스코이호의 이야기를 듣고 쓴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울릉도 나리분지가 마치 태극을 닮았으며, 나리분지 서쪽에 둥글게 감싼 곳 아래에 샘이 있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차가운데 목욕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이며, 이 샘을 태극천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얘기도 있다.
조재학 선생님의 묘비 및 기념비는 고향인 경남 의령군 화정면 삼정리에 있다. 특히 경남 의령 화정초등학교 교정에는 선생과 울릉도에 얽힌 특별한 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한다. 바로 조재학 선생님이 1915년 울릉도 귀양살이를 마칠 때 울릉도에서 가져온 동백나무라는 것이다.
김 대장은 “조재학 선생님의 울릉도 유배 시절에 관한 더 자세한 후속 연구와 함께 조재학 선생님을 매개로 경남 의령군과 울릉군의 다양한 교류 활동도 이어졌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김두한기자kimdh@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