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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

등록일 2023-04-04 20:05 게재일 2023-04-0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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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보내는 밤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언스플래쉬
시인이 보내는 밤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언스플래쉬

시는 언어로 이루어진 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언어로 설명될 수 없다. 박연준 시인은 자신의 시 ‘밤의 식물원’에서 말한다. ‘시 쓸 때 내 얼굴엔/밤/비/뱀이 내리고/층층나무 열한 그루 사이를/옮겨 다니며 숨는 사람’이라고.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시는 ‘밤의 머리카락’처럼 ‘묶을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시는 ‘작고 굵은 것을 잉태’하며 ‘비탈길을 타고 도망가’기 쉽고 ‘모든 것에 스민 후 재빨리 사라지’는 모양일지도 모른다.

나는 시인들이 좋다. 시보다 시인이 좋을 때도 있다. 이상한 일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은 늘 시인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고뇌하는 밤. 빈종이 위로 채워지는 낯선 언어. 그것을 쓰는 손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부지불식간 사랑에 빠지고 만다.

시인에 관한 일방적인 짝사랑은 꽤 오래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은 나의 아버지로부터 기인하였을 테다. 아버지는 시를 썼다. 썼다는 말은 이미 종결된 사건으로 느껴지지만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물론 그는 지금도 시를 쓴다. 이따금 그것을 내게 보여주기도 하는데 세상 밖으로 내보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사그라지지 않는 예술적 불씨를 감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겐 그런 내색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의 아버지는 멋을 아는 사람이다. 외적으로 자신을 꾸미는 일에도 능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인생의 가치를 안다. 삶의 유한함을 이해하고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알고 놓쳐서는 안 될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예리함이 있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해서 지금까지도 부단히 노력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그런 모습이었다. 어딜 가도 멋지게 차려입는 것은 물론이었고 유려한 말솜씨로 사람들 사이에서 늘 중심을 차지했다. 언젠가는 뒷머리를 말꼬리처럼 길러서 보라색으로 염색하기도 했었다. 보라색 머리카락과 백석의 시집이 잘 어울린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의 손을 잡고 동네를 걸어 다니면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봐, 우리 아빠는 이렇게 멋진 사람이야.’ 그런 생각은 지금까지도 유효해서 여전히 나는 나의 아버지를 여기저기에 자랑하고 싶다.

아버지는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색소폰을 연주했으며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교사를 꿈꾼 것은 아니지만 교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가난하고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으므로 그런 불행이 지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때문에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그로 인해 꿈이 좌절되는 순간을 맛보기도 했다.

나는 나와 닮은 어느 청년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제대로 된 삶을 손에 쥐기 위해서 부단히 발을 구르던 한 남자를. 어느덧 나는 그의 나이와 비슷해지고 그의 몸짓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도 같다. 낭만에 매몰되는 순간 무너지는 현실적 삶이 있다. 이상만큼 중요한 건 먹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나는 알고 있다. 책상 앞에 앉은 시인의 밤이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자기 의심과 불안으로 가득한 시간을 견디면 모든 걸 마주했다는 생각과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자각이 동시에 떠오를 것이다. 낯선 언어를 쓰는 손은 현실과 뒤엉켜 생채기로 가득할 것이다. 그러니 그 밤을, 그 손을, 어떤 본질을 끝끝내 움켜쥐려는 애달픈 마음을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고민이 찾아오면 나는 주저 없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건다. 그가 내어주는 답은 늘 명쾌하고 선명하다. 그는 현실을 살면서 낭만을 꿈꿨던 어른이다. 내가 글 쓰는 삶을 택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신춘문예 당선 전화를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떠올렸던 사람도 아버지였다. 내가 작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서 위경련이 일어났다던 아버지. 나의 예민함과 날카로운 기질까지 작가적 영역으로 치환시켜준 아버지. 그는 내 인생을 긍정할 수 있게 만들어준 가장 고마운 조력자다.

감히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버지의 언어로 만들어진 인간이다. 그가 내뱉었던 문장으로 구성된 딸이다. 세상의 유려한 문장에 마음이 요동쳐도 중요한 순간엔 내 안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보일 리 없지만 분명하게 보이는 마음. 그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 건네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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