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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그리움

등록일 2023-03-29 18:02 게재일 2023-03-3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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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영 수필가
정미영 수필가

경주 보문단지에 벚꽃이 만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나뭇가지마다 봄기운이 완연하다. 산들바람을 따라 꽃잎이 날아오른다. 나비떼를 보는 것 같은 황홀감에 한참을 서 있었더니, 앞서가던 일행이 내 이름을 부른다.

일행은 꽃나무에 둘러싸여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그런 연유로 기어이 산책로 가운데로 진입했으나, 나는 가지 않았다. 중심에서 사람들에게 떠밀려 다니는 것보다 양지바른 한쪽에서 전체 풍경을 내 눈에 가득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돗자리를 깔고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음지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벚나무에게도 꽃봉오리가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다. 나는 나무가 기특해 쓰다듬었다. 그 순간 뚝, 하고 봉인되었던 그리움 하나가 세상 밖으로 튀어나왔다.

대학시절, 친구들과 학교 근처에 위치한 보육원에 방문했다. 자원봉사를 해보자는 친구의 말에 처음에는 망설여졌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마음이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섰던 한때가 나에게는 존재했었다. 더군다나 어린이들을 만나러 간다는 말에 더더욱 책임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던 친구의 말에 용기를 냈다. 어린이들에게 말벗이 되어 주는 일은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여야지, 머릿속으로 너무 오래 고민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보육원에는 외로움을 느끼는 어린이가 있기에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는 것이었다. 숙련된 손길로 세탁을 하고 청소를 해주는 것도 좋지만, 서툴러도 진심으로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주말에 몇몇 친구들과 보육원을 방문했다. 먼저 설거지를 하고 방 청소를 도운 뒤, 어린이들과 산책을 하기 위해 운동장으로 나갔다. 가장자리에는 벚꽃이 활짝 피어 바라보는 이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동행할 어린이를 찾다가, 구석에 움츠리고 앉아 꽃잎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던 소녀에게 다가갔다.

아이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틈을 두고 앉았다. 소녀는 나를 의식하지 못했는지 얼굴을 들지 않았다. 자신이 하던 일에 묵묵히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모습이 그냥저냥 너무 귀여워 같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한동안 꽃잎을 줍던 아이가 어느 순간 나의 존재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나하고 산책할래?” 머뭇거리지도 않고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그제야 나도 일어서며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내 손에 꽃잎들을 쥐어주며 책갈피를 만들면 예쁠 것이라고 했다. 꽃잎에 아이의 선한 마음이 담겨 내게로 건너왔나 보다. 내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며 나도 모처럼 순수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즈음 나는 취업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불투명한 현실에서 겪는 내 심리적 압박과 우울한 기분을 조교에게 토로하는 일이 잦았다. 숱한 번뇌와 좌절로 점철된 하루하루를 보냈다. 푸를 것 같던 젊음이 점점 시들해지고, 마음은 흔들다리 위를 건너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런데 아이의 앙증맞은 손을 잡고 산책하는 동안 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동안 내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우울했던 기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보육원을 방문했던 것은 어린이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서였다. 오히려 내가 위안을 받다니.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의 나는, 처음에 보육원을 찾아오기 망설였던 내가 아니었다. 어느 순간 그 아이와 재방문을 약속하며 새끼손가락을 걸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면면히 만나러 갔다. 우리는 꽃잎을 주워 색지에 붙이고 자신이 좋아하는 낱말을 써서 책갈피를 만들며 놀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와 그 아이의 만남은 두 계절 동안이었다. 내가 다른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시 바람이 불어온다. 벚나무 꽃잎들이 리드미컬하게 춤사위를 이어간다. 그 끝자락을 소녀에 대한 내 그리움이 바투 잡고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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