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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물고기를 만나다

등록일 2023-03-28 20:01 게재일 2023-03-29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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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에게 희망을 선물한 제주의 넙치농어.

세상이 내게서 등을 돌리고, 인생이 나를 배반한다. 노력의 결과는 허망한 실패이고, 뜻밖의 고난에 대책 없이 무너져 내린다.

올해 마흔이 됐는데, 내 꼴이 딱 그렇다. 한 대학교의 전임교수 공개채용에서 최종 3인까지 올라갔지만 공개강의와 면접까지 치르고서 탈락했다. 내 나름으로는 인생을 건 도전이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끝내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했다. 눈앞이 캄캄하고, 막막했다. 다시 기회가 있을까? 찢기고 패인 마음을 우선 달래야만 했다. 구두와 양복을 눈에서 안 보이는 곳에 치워놓고 낚시 장비를 챙겼다. 제주도에 열흘쯤 내려가서 아무 생각 없이 낚시만 하다 오려고.

낚시에서 마음을 비우면 인생도 좀 달관하지 않을까? 하지만 넙치농어만큼은 꼭 잡고 싶었다. 6년을 기다린, 내 꿈의 물고기이기 때문이다. 꽤 오랜 세월 낚시를 하면서 바다와 강에 사는 온갖 물고기들을 만났다. 2019년에는 러시아 아무르강에 가서 타이멘과 파이크, 레녹을 잡기도 했다. 그런데 늘 마음 한켠엔 어두운 방이 있고, 그 어둠 속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예리한 은빛 섬광이 어른거리다 사라지곤 했다. 그 매혹적인 섬광은 넙치농어의 것이다. 2017년 초, 제주 현지 전문가의 넙치농어 낚시 영상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저렇게 멋진 물고기가 있다니!

그 당시 겨울 제주도에 가 ‘맨땅에 헤딩’을 감행했다. 넙치농어는 난류성 어종으로 회유하는 성질이 있는데, 제주 남쪽인 서귀포 일대와 가파도, 지귀도, 마라도 등에서만 잡을 수 있다. 그 위쪽으로는 여간해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 어렵다는 넙치농어 낚시에 도전한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영하의 날씨에 꽁꽁 언 손이 떨어져나가는 듯했다. 그 와중에 실수로 낚싯대를 부러뜨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4박5일간의 넙치농어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건 내가 할 낚시가 아닌가보다 하고 단념했다. 그리고 6년이 지났다.

서귀포에 넙치농어가 꽤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6년을 기다려 넙치농어에 재도전하는 날이 밝았다.

몇 개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며 겨우 포인트에 진입했다. 거센 파도가 사방을 뒤덮는, 야성적인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첫 캐스팅(낚시를 던지는 행위) 후 릴을 감으며 지형을 파악했다. 그리고 두 번째 캐스팅, 천천히 릴을 감는데 퍽! 하는 입질, 넙치농어를 걸었다.

꾹꾹 처박으면서 암초를 향해 돌진해 낚싯줄을 끊으려는 질주가 굉장했다. 어느 정도 힘을 빼 거의 제압했다고 생각한 그때, 그만 놓쳐버렸다. 넙치농어의 필사적인 바늘털이에 당하고 만 것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경계심이 강한 넙치농어는 잡았다가 놓치게 되면 다른 개체들까지 예민해진다. 나는 또 다시 교수 채용 탈락 통보를 받았을 때의 심정이 돼 버렸다.

포기할 수는 없었다. 부지런히, 아니 처절하게 두드려보기로 했다. 우측에서 좌측, 좌측에서 우측 부채꼴 모양으로 30분쯤 캐스팅을 반복했을까? 흰 포말에 덮였다가 검은 이마를 드러내는 암초 옆에서 또 한 번의 강력한 입질을 받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넙치농어였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챔질을 확실하게 하고 낚싯대를 옆으로 눕혔다. 수중 암초를 향한 폭발적인 질주가 몇 차례 있을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다 녀석이 허공으로 힘차게 솟구쳐 오르는 순간 심장이 터질 듯했다. ‘오냐, 살려는 몸부림이 처절하구나. 하지만 나도 살아야 한다. 네 얼굴을 봐야만 내가 살겠다. 그러니 오너라!’

끌려오던 녀석이 마지막으로 거칠게 저항했다. 발 앞 바위틈으로 처박는 바람에 낚싯줄이 날카로운 바위에 쓸리기 시작했다. 줄이 끊어질 것 같아 서슴없이 물로 들어가 바위 반대편에 서서 침착하게 릴을 감았다. 한 평생 같은 십 초가 지나고, 드디어 은빛 실루엣이 수면에 넘실거렸다. 빛나는 은린 갑옷을 입은, 6년을 기다린 내 꿈의 물고기 넙치농어였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68센티미터. 큰 사이즈는 아니라고 하지만 내게는 너무 소중하고 행복한 인생고기다. 대학 교수 그거 아무것도 아니다. 대한민국에 대학 교수보다 넙치농어를 잡아본 사람의 수가 훨씬 적을 것이다. 누가 더 귀한가? 나는 넙치농어를 잡은 사람이다. 거친 제주바다가 내게 준 선물은 넙치농어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해내겠다는 용기와 의지, 어떤 꿈이든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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