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의 베스트셀러를 보면 동시대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고들 한다.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물론이고 대중의 내밀한 욕망까지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서점 사이트만 들어가 봐도 그렇다. 읽으면 부를 거머쥐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책과 욕심을 내려놓고 흘러가는 바람처럼 살아가자는 책이 나란히 놓여있다. 이러한 양극의 발화야말로 우리 시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지점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외침과 ‘이번 생은 망했다’며 자조하는 목소리 사이에서 우리는 방향을 잃고 헤매기 쉽다. 세상을 향해 힘차게 주먹을 휘둘렀으나 보이지 않는 손에 어퍼컷을 맞고 KO패 당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살면서 누구나 냉소와 허무를 맞닥뜨리기 마련이고 그날그날 편하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처럼 여겨진다. 그러다가도 문득 이렇게 나태하게 살 순 없다고, 더욱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압박이 밀려오기도 한다. 이처럼 복잡한 세상에서 혼란한 자신을 이끌어줄 수 있는 명백한 답을 찾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나는 신이다’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대한민국의 사이비 종교를 고발하고 집단적인 폭력에 관해 파헤치는 내용의 프로그램은 공개와 더불어 많은 사람을 분노하게 했다.
그 어떤 이유라도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인간의 존엄을 완전히 말살시키는 행위들. 어떠한 가치를 향한 의지가 크면 클수록 자기 존엄성보다 희생이 앞설 수밖에 없다. 사이비 종교 집단은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행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가감 없이 벌인다.
다큐멘터리에서는 눈이 찌푸려질 만큼 자극적이고 적나라하게 피해 상황을 보여준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뀌는 상황이나 권위를 내세우던 사람이 몰락하는 과정, 한 인간을 무분별하게 신격화하는 것의 위험성과 사람들을 착취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이득을 취하는 모습까지. 모두 인간이 행한 일이며 종결되지 않은 끔찍한 사건이 우리 주변에서 아직도 벌어지고 있다.
진리를 알고 그를 통해 구원받으며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정답을 나 혼자 알고 있다는 사실만큼 달콤한 것이 또 있을까. 당장의 현실은 고달플지 몰라도 믿고 따르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또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
책을 덮고 당장 일어나 밖으로 나가라는 자기계발서의 조언을 따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지 나가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 그곳에 정답이 있다고 보장되어있는 한, 누구나 자신만만하게 발을 내디딜 수 있다.
사이비 종교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적극적인 자기 확신과 맹목적인 자기 믿음은 다르다. 한 사이비 교주를 체포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애써왔던 사람은 그의 실체를 마주하고 이렇게 보잘것없고 겁 많은 사람을 쫓던 것이 허무했노라고 고백한다. 어떤 인간도 완전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신이라는 절대자를 붙잡는다. 인간은 완전해질 수 없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에 가깝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했던 그 유명한 변론을 떠올려 보라. 그가 유일하게 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던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의문하고 의심하고 전복하면서 철학과 과학과 종교는 발전되어 왔다. 사랑과 행복 같은 관념은 늘 선행적으로 존재한다. 결국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삶의 본질이다.
언젠가 외부 강의에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어떤 소설을 써야 소설가로 데뷔할 수 있습니까?” 질문 자체보다 거기에 무언가를 대답하려고 했던 나 자신에게 당황했다. 그러니까 나는 나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그것을 정답이라고 내어놓을 수도 있던 것이다.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고 질문자의 얼굴에서 실망의 기색이 떠오르는 것을 목격했다. 이따금 생각한다. 나는 그때 어떤 답을 주려고 했던 걸까. 어쩌면 이제껏 그것을 답이라고 믿고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고 말하기는 쉽다. 어떤 상황에선 모르겠다는 발화가 명쾌하고 산뜻해 보이기까지 한다. 끝끝내 어려운 것은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이다. 그것은 무지의 영역보다는 앎의 영역에 가깝다. 자기 의심과 자기 확신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떤 방향으로든 나아가는 그 걸음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