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형제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잖아.” 몇 해 전 이스탄불에서 시작해 도우베야짓까지 튀르키예 여러 도시를 1개월쯤 여행했다. 그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형제의 나라’였다.
기차에서 사과를 깎아 건네던 할머니께 “괜찮다”며 사양의 의사를 표했을 때도, 이란 영사관 가는 길을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물어가며 안내해준 사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을 때도, 생전 처음 만난 영감님의 집에서 식사를 대접받았을 때도 “튀르키예와 한국은 형제의 나라니 이 정도 친절과 환대에 어색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길 들었다.
시계를 70년 전으로 돌려보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동족이 서로에게 총칼을 겨눠야했던 비극의 역사가 우리 땅에서 벌어졌다. 죽음과 삶이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게 전쟁이다. 귀한 목숨이 한순간에 동백꽃처럼 떨어질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땅이었던 한국.
하지만, 튀르키예는 망설이지 않고 한국으로의 파병을 결정했다. 미국, 영국, 캐나다 군인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숫자였다. 고통을 겪는 한국으로 수많은 튀르키예 청년들이 온 것. 한때 지구의 1/3을 지배했던 강력한 군사제국 오스만 튀르크의 후손답게 튀르키예 군대는 용맹했다. ‘작전상 후퇴’라는 개념이 머릿속에 내장되지 않은 튀르키예 군인들은 전투 최일선에서 전진만을 거듭했다. 그래서다. 한국전쟁 참전국 중 파병 군인 대비 전사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튀르키예다.
총탄이 쏟아지는 참혹한 전쟁터였지만, 튀르키예 군인들은 한국에서 가슴 따뜻한 이야기도 만들어냈다.
전쟁고아가 된 한국의 어린 소녀를 자신의 딸처럼 보호했던 튀르키예 군인은 눈물바람으로 이별한 지 6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소녀를 잊지 않고 온갖 노력 끝에 다시 만난다. 튀르키예와 한국이 공동제작한 영화 ‘아일라’에 그 스토리가 고스란히 담겼다. 튀르키예에선 600만명이 넘는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며 이 영화를 관람했다고.
튀르키예 사람들은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이 거의 없고, 낯선 사람에게도 호의를 베푸는 경우가 흔하다. 바로 그 튀르키예, 생명을 거는 전쟁에서 기꺼이 한국을 도왔던 튀르키예가 예상치 못한 큰 지진으로 국가 비상사태에 빠졌다. 이미 3만여 명의 사람들이 죽었고, 일부 보도에 따르면 사망자가 10만명에 이를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까지 나왔다. 이쯤 되면 ‘자연재해가 일으킨 홀로코스트’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70년 전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튀르키예는 국제사회의 도움이 절실하다. 이제 우리가 나설 때가 아닐지.
한국인의 핏속엔 환난상휼(患難相恤)의 정신이 흐른다. 타인의 고통에 눈 돌리는 건 인간만의 특성인 휴머니티를 배반하는 행위다. 오늘 바로 지금,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는 이들을 돕는 건 인간애의 생활 속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