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를 찾았다. 엄청난 크기에 감탄사가 먼저 나왔다. 불이문과 절 마당에 앉은 석탑과 석등을 비롯하여 각황전과 대웅전이 주는 웅장함과 엄숙함에 저절로 손이 모아졌다. 두루 돌아보며 흔적 남기기를 열심히 하고 보제루에 앉아 땀을 식혔다. 부처의 사랑을 품은 세계, 이곳은 고결한 향내가 나는 것 같았다. 열린 문을 통해 보이는 보리수와 단풍나무, 탑과 전각들, 절 뒤로 보이는 산이 그려내는 풍경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마당을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살폈다. 모두가 편안한 얼굴이다. 경내를 휘젓는 바람과 말소리가 어우러져 경전이 되고 깨달음이 되는 공간이었다.
대웅전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 구층암으로 향했다. 오른쪽으로 대숲이 빽빽하다. 호젓한 오르막길을 맑은 기운에 젖어 조금 걸으니 구층암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본 화엄사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모든 건물이 산에 안기듯이 나지막하고 수수했다. 절마당을 지나는데 삼층 석탑이 시선을 끌었다. 잘 다듬어져 예술품으로 탄생한 탑이 아니었다. 조각난 돌이 얼기설기 얹어져 손을 대면 무너질 듯 어설픈 탑이었다. 한 바퀴 돌아보니 정면은 멀쩡한데 보는 방향에 따라 누군가 소원을 얹은 산길의 돌탑 같았다.
돌탑은 간절함이 쌓아올린 축적물이다. 이름 있는 산사나 신성함이 깃들었다고 소문난 산을 찾아온 이들이 자신의 애달픈 정성을 얹은 탑이다. 그것은 멋과 예술의 경지가 아닌 지극한 마음이 빚어낸 성물이며 보이지 않는 간절한 기원이 해를 거듭하며 쌓여가고 있다. 언제부턴가 나도 산을 찾을 때면 만나는 돌탑 앞에서 슬쩍 돌 하나를 얹는다.
옛날부터 탑돌이 풍습이 있었다. 탑은 부처님을 모신 곳이라 정성껏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불교가 융성하던 시절에는 연례행사와 상관없이 자식 얻기, 부모님의 건강, 굶주림 벗어나기, 맺을 수 없는 사랑을 위한 탑돌이가 있었다. 아마도 소원이 이루어지는 이가 있었기에 김대성의 이야기도 나왔을 확률이 높다.
구층암 석탑은 온몸으로 장구한 세월을 맞았다. 무너져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돌들을 정성껏 쌓아서 다시 탑의 형태로 돌아왔다. 차곡차곡 각을 재듯 정제된 미는 없으나 돌탑의 구원을 고스란히 느꼈다. 어설픈 단장이지만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은 것은 돌에 깃든 비손의 힘이 아닐까.
이름난 산길에서 만나는 돌탑의 매력은 자연스러움이다. 오랜 세월 간절한 이의 소원을 머금은 채 형식 없이 쌓이고 쌓인다. 누구도 제것을 위해 다른 돌을 옮기거나 무너뜨리지 않는다. 돌에 깃든 마음의 깊이를 가늠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서로의 기원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동병상련의 마음이 스며들어 서로를 붙드는 힘이 생긴다. 그 탑은 잘나고 못나고의 시각이 아닌 진정성으로 평가받는다. 삐죽빼죽 못난이지만 아픔의 결과 사랑의 결이 돌 사이를 메꾸어 부족함 없는 탑이 되었다. 장인의 탑과는 다른 매력으로 마음을 움직인다.
무엇이든 쌓는 것은 노력이 필요하다. 덕을 쌓거나 복을 짓거나 인연을 만들고 사랑을 나누고 웃음을 나누는 것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 선함을 쌓는 일이고 분노나 화를 쌓거나 미움과 시기에 휘둘리고 상대에게서 권력이나 재물을 뺏어오는 것은 악을 쌓는 일에 시간을 들이는 것이다. 일생을 공들인 탑의 결과가 어떨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이가 들면서 좋아진 점이 있다면 생명을 좌지우지하지 않는 것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슬프면 슬픈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흘려보낸다. 견뎌내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속에 감정 찌꺼기를 쌓지 않는다. 오늘 같은 내일이면 감사하며 살자는 마음이 크고, 주위에 따뜻한 사람들이 많았으면 싶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좋은 일이 많은 것도 아닌데 남을 돕는 것에 앞장서 손을 보태는 사람들과 자신의 것이라 고집하기보다 남을 채워주려고 퍼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닮으려 애쓰는 것이다.
인생탑을 쌓는 일은 쉽지 않다. 나는 긴 길을 걸으며 만난 크고 작은 일을 겪은 뾰족하고 불퉁한 모양으로 쌓았다. 지금부터 마음을 다듬어 볼수록 매력이 있는 탑을 쌓아야겠다. 창작의 고통을 즐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