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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이라는 두 글자

등록일 2023-01-25 19:39 게재일 2023-01-26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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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영 수필가
정미영 수필가

새벽바람의 기척으로 돋을볕이 숲속에 스며드는 시간이다. 자연과 사람을 잇는 노거수 숲을 걷기 위해 연일 중명 원골숲으로 들어선다.

노거수 우듬지를 비추는 햇살 한 점에 눈이 부시다. 고요히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한 마리 새처럼 삶의 아포리즘을 받아쓰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마을 숲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400년 된 회화나무 7본과 말채나무를 비롯해 팽나무, 느티나무 등속의 노거수가 많이 있다. 아름드리나무 숲길 위에 잠시 멈춰 서 있으니 한줄기 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노거수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면 수많은 잎들이 사연을 매달고 있는 듯하다. 나는 나뭇잎 속에 담겨 있는 씨줄날줄 설피창이로 엮였던 이야기들을 정독한다. 그늘에 앉아 땀을 식히며 소중한 자식을 기다리던 늙으신 부모님의 그리움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했던 누군가의 아픔까지, 나무는 화석처럼 온전히 기억하며 나뭇잎으로 피워내는 것 같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공존의 이유가 있을 터이다. 자연의 윤회 속에서 나무와 사람이 서로 이웃하여 안부를 묻고 있는 곳이 원골숲이다. 노거수의 몸피가 야위면 사람이 막걸리 몇 사발을 부어 주며 원기를 북돋우고, 사람의 몸과 마음이 허기지면 나무가 치유의 기운을 내뿜어 주는 곳이 여기다. 가끔은 나무가 사람에게, 가끔은 사람이 나무에게, 서로 의지해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하다.

바람의 지문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노거수 사이를 걸으며 생각의 깃을 세운다. 나직이 두런거리는 나무의 문장들을 음미하다 보니, 어느새 마을 정자 앞이다. 어르신들이 담소를 한가로이 나누고 있다. 수령이 많은 나무와 연세가 지긋한 노인의 모습에서 닮은 듯, 연륜이 묻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주름진 나이테에서 지나온 세월의 흔적을 가늠해 본다.

나무의 내력을 알고 있는 그 분들 곁에서 600년 된 회화나무가 쉬나무를 의지해 살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한국 전쟁 이후 어느 해, 개구쟁이 아이들이 나무의 동공(洞空) 속에 들어가 놀면서 불장난을 했다고 한다. 이 나무 옆에 쌓아두었던 콩더미에 불이 옮겨 붙는 바람에 화력이 더해져 상당 부분 소실되었다. 회화나무는 몸통이 불에 데여 흉터가 남고 나뭇가지가 일그러졌단다.

쉬나무를 의지해 고난의 시간을 견뎠던 것일까.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려면 혼자 힘으로는 안 되고 근처 나무와 어깨를 겯고 있어야 된다는 공존의 이치를 터득했을 것이다. 그래야만 거센 폭풍우를 견딜 수 있고 눈보라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체득했을 것 같다.

쉬나무는 해마다 수북하게 꽃을 피운다. 어쩌면 쉬나무는 회화나무가 상처를 딛고 봄마다 여린 잎을 피어내는 모습에 더욱 분발했을 수 있다. 그 덕분에 꽃 무더기 사이로 꿀벌들이 날아다닌다. 쉬나무는 여름에 향기롭게 꽃을 피워 꿀을 듬뿍 담고 있는 밀원수종이다. 다른 수종의 나무뿐만 아니라 자신을 찾는 생명들에게도 의미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니 소중하다.

저마다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가 다르다. 하지만 나와 인연을 맺는 이들에게 쉬나무처럼 도움을 주는 의미 깊은 삶을 살아도 좋을 성싶다. 노거수의 너그러운 성품이 내게 옮겨와 내 마음을 가득 물들이면 무채색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세상이 훨씬 곱게 보일 거라며, 나보다 생을 오래 건너온 나무가 나를 위해 덕담 한 마디 따스하게 건네준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회화나무 줄기를 쓰다듬어 본다. 노거수의 숨결이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음률로 내 마음을 품어 주는 것 같다.

나는 메마른 일상이 반복되어 간신히 버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지금처럼 노거수 앞에 두 팔 벌려 우두커니 서 있을 것이다. 소멸되지 않는 나무 영혼을 끊임없이 소환하여 치유라는 이름으로 불러주면 아마 내 마음은 편안해지겠지.

나는 지금,

노거수 아래에서 공존이라는 두 글자를 내 마음에 돋을새김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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