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작가의 ‘엄마 생각’시를 낭독해 본다. 시인의 어머니는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 열무를 팔러 다니면서 가족들을 건사했다고 한다. 시인은 어른이 된 훗날, 고단했던 어머니의 삶을 떠올리며 작품을 썼다. 어머니와의 야윈 추억들로 그는 가슴이 자주 먹먹했을 것이다.
나 또한 친정어머니의 지난했던 생활을 생각하며 집필할 때가 많았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은 구멍가게를 운영했다. 그 즈음 할머니의 병환이 깊어 어머니는 가만히 있어도 긴 한숨이 새어나오는 답답한 나날 속에 파묻혀 지냈다.
어머니는 명치가 뻐근할 정도로 숨이 막힐 때면 가게에서 팔아야 되는 껌 한 통을 뜯어 껌 종이들을 펼쳤다. 껌 종이에는 시가 인쇄되어 있었는데, 어머니가 즐겨 읽던 시는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였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로 시작되는 시를 마음에 담으며, 껌의 단물처럼 달착지근한 희망을 계획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시 읽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자랐다. 나에게는 하이네의 ‘그대는 꽃인 양’이란 시를 읽어주었다. ‘그대는 한 송이 꽃처럼 귀여이 맑고 아름다워라’로 시작되는 시를 들려주며 딸에 대한 소망을 간절히 기도했다.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이 시를 들으면 마음이 한없이 편안했다.
어느 덧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였다. 처음 참고서를 사기 위해 서점을 찾았던 곳에서 ‘세계 명시 선집’을 발견하고는 페이지를 넘겼다. 순간 가슴이 찌르르 했다. 선집 안에는 내가 오래도록 껌 종이에서 보았던 낯익은 시들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서슴지 않고 참고서를 제치고 시집을 사버렸다. 시 속의 단어들은 여전히 내 감수성을 일깨우고 채워주었다. 가슴 저미는 시행을 접하면 저절로 눈물이 흘렀고, 맑고 순수함이 느껴지는 시를 읽으면 내 마음 한 자락이 따스하게 덥혀졌다.
햇살 눈부신 날이었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 제삿날인데도 가게 일 때문에 집을 나설 수 없었다. 나는 언뜻 어머니의 눈망울이 젖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때 나는 슬픈 현실이 주는 암담함의 크기가 얼마나 깊은지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파란 하늘을 초점 없는 눈으로 하염없이 올려다보는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날 밤, 어머니의 웅크리고 자는 모습이 내 눈에는 달팽이처럼 보였다. 몸을 자신의 껍데기 속에 집어넣고 있는 달팽이처럼, 어머니도 자신의 감정과 언어들을 마음속으로 둘둘 말아 넣고 잠을 청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다음 날, 나는 책가방 속에 들어 있던 시집을 꺼내 어머니에게 드렸다. 어머니가 껌 종이를 내게 주었듯이 나는 시집을 어머니에게 드렸다. 어머니는 나와 눈을 맞추고 난 뒤 시집을 넘겼다. 조용히 몇 편의 시를 읽고는 어떤 시가 마음에 들었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익숙한 시도 좋았지만 새롭게 알게 된 시 가운데 한 편을 말했다.
우리는 시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나눴다. 중학교에 올라오면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한다고 분주했던 나였다. 그런 나를 앉혀 놓고 껌 종이에 적힌 시를 읽어주지 못했던 어머니는 오래간만에 나에게 시를 읽어주었다. 주어진 생활이 고단해 어머니의 마음이 시리고 건조해졌을 것이라 나는 여겼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나를 마주대하는 어머니의 가슴은 다행스럽게도 따뜻했다. 어머니는 조용히 일어나 가게 선반 위에 두었던, 시를 품고 있는 껌 종이를 들고는 시집 속에 책갈피처럼 끼웠다.
시집은 시심을 울리게 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딸을 이해하고 딸 역시 어머니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때 자습서 대신 시선집을 샀던 일을 비롯해 그동안 품었던 생각을 속속들이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어머니가 있어 고마웠다.
기형도 작가의 시집을 다시 펼친다. 향긋한 껌 향기가 퍼지는 것 같아 내 입 안 가득 침이 고인다. 나는 달콤한 시를 곰비임비 읽는다. 단물이 입안에 고이듯 시를 내 가슴에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