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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길을 보다

등록일 2022-12-07 19:38 게재일 2022-12-08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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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순 수필가
양태순 수필가

댓잎이 사그락거린다. 대나무가 여린 바람에 구불구불 몸을 흔들며 고요를 털어낸다. 적막에 들었던 시간을 깨워 일제히 허리를 구부려 나를 끌어당긴다. 발보다 귀가 먼저 닿는다. 대와 대 사이를 지나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서 있으면 맑은 기운이 마음을 차지한 무거운 기운을 조금씩 밀어내는 것이 느껴진다. 내쉬는 숨이 텁텁하지 않다.

대숲을 뒤로하고 걸음을 뗀다. 사박사박 소리를 달고 흙길을 걸으며 옛 생각에 젖는다. 몇백 년 전 유배지에서 우암과 다산이 걸었을 길, 그 길에서 복잡했을 마음을 짐작해보는 ‘사색의 길’에서 잠시 그들의 생각을 엿보려 한다. 걸음마다 발뒤축에서 분가루 같은 먼지가 날린다. 마치 뿌옇게 산란하는 안개처럼 자신들의 앞날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을 보는 듯하다. 길을 걸으며 갑갑하고 답답한 날에 한숨을 얹기도 하고 새로 깨달은 학문을 정리하기도 했으리라. 길이란 때로 어디로 향하는 목적보다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과 자유롭게 드나드는 생각을 펼치고 나름의 이론으로 정립하기 좋은 장소기도 하다.

‘사색의 길’을 내려와 다리를 건너 장기 유배문화 체험촌에 들렀다. 먼저 105인 기록 이야기 벽으로 갔다. 다산과 우암이야 워낙 유명인이고 알려진 것들이 많으니 뒤로 미루고 어떤 인물들이 왔는지 기록을 읽어 나갔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 사이로 몇몇 아는 이름이 보인다. 박팽년과 관련 인물, 이시애의 난 관련 가족, 남이 역모 사건 관련, 이인좌의 난 관련 인물들이다. 조선시대는 역모가 가장 무거운 형벌을 받았음을 다시 확인한다.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여인들도 왔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연좌제가 있어 부인과 며느리도 당연히 있었을 터인데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마도 방송에서 유배 생활을 보여줄 때 주로 남자만 나왔기 때문이지 싶다.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얼마나 단편적인 사고를 확립하는지 경계해야 할 일임을 새긴다.

이름 석 자도 없는 그녀들이 눈에 밟혔다. 누구의 처, 누구의 첩, 누구의 며느리로 기록된 그들의 삶이 어땠을지 나는 짐작조차 어렵다. 주로 여자는 관노로 일한다고 들었는데 곱게 자라 양반가에 시집을 가서 궂은일 하지 않고 아랫것들 단속하고 부리는 일에 익숙했던 이들이 어떻게 견뎠을까. 관청의 관리나 포졸들, 마을 양반들이 탐욕에 눈이 멀어 희롱하거나 인간의 선을 넘었으면 그들은 자신을 포기했을 것이다. 참담한 심정이 오롯이 전해진다.

되돌아보는 지난날은 누구나 아쉬움의 연속이다. 그때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부질없는 후회와 되새기는 시간은 비애와 고뇌를 번갈아 버무려선 매콤하게 심장을 찔렀다. 다시 되돌린들 상황과 사람과 이념이 서로 아귀를 맞추어 돌아가는데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다.

인생은 직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주요 분기점마다 찍힌 점들이 오르락내리락 곡선을 그리다 바닥을 찍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바닥이 있어 배우는 것들이 있다. 진정한 타인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고 자신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삶과 사람을 대하는 자세에서 딱딱한 잣대가 아니라 알파라는 미지수를 더할 줄 아는 품이 커진다. 걸어오면서 겪은 온갖 감정을 꿰매 우툴두툴한 곡선으로 만들어진 무늬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가치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유배지의 밤은 파랗다. 밤은 사색의 문을 열어두어 사념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달려가고 달려온다. 지푸라기에 불을 붙이듯 작은 꼬투리에 뼈대를 세우고 살을 입히고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고, 과거의 어느 날을 당겨오고 밀어내느라 생각의 방에는 밤새 불이 켜져 있다. 나무들이 모조리 깨어나 방을 둘러싸고 뭇별들이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서 각자의 서사는 덧대어졌다. 그들의 삶에서 유배 생활은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마냥 억울하고 화나는 시간만은 아니었지 싶다. 조용히 사색하면서 학문을 탐구하고 인간사 근본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을 터다. 이 땅의 선비이자 학자의 신분으로 해야 할 일을 다시 정립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햇살이 바다를 건너고 들을 건너와 발밑에 눕는다. 세상이 갖가지 사건들로 떠들썩하더라도 내 중심은 언제나 사람이 먼저이기를. 따스함에 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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