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한 기운이 몰려온다. 장마가 시작된다는 일기예보에 맞게 날씨는 종잡을 수 없게 제멋대로다. 쨍쨍한 햇살에 싱그럽던 잎마저 시르죽하다 싶은데 천둥이 우르릉 울리더니 한줄기 비가 내린다. 열에 달궈진 대지를 식혀준 비 때문에 습도가 높아져 몸이 까라진다.
여름은 언제나 뜨거웠다. 십 리 길을 걸어올 때면 가방의 무게에 어깨가 늘어졌다. 정수리에 내리꽂는 빛살에 얼굴이 익어가고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은 축축해서 잠시 다리쉼을 해야 했다. 그런 우리에게 그늘이 필요했고 그 그늘을 제공해준 나무는 미루나무였다.
여름 하굣길을 지켜주는 미루나무였다. 먼지 폴폴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타박타박 걸을 때면 길가에 쭉 늘어선 미루나무가 잎사귀를 살랑살랑 흔들어 더위를 식혀줬다. 우리는 가방을 한데 모아놓고 그늘에 앉아 웃고 떠들다 지나가는 친구가 보이면 불러서 같이 고무줄놀이하고는 했다.
마을 공터에는 미루나무가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시간 나면 거기로 갔다. 매미 소리 쨍하던 한낮의 열기가 조금 숙지면 고무줄놀이가 시작되었다. 노래를 부르며 폴짝폴짝 뛰기도 하고 고무줄에 발을 걸어 꼬기도 하고 고무줄을 잠시 지르밟았다 풀어주기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여자애들 옆에서 남자애들은 저들끼리 키득거리며 놀이에 코를 박고 있다가 슬쩍 곁눈질을 했다. 때로는 슬금 다가와 훼방을 놓기도 했지만 고무줄놀이를 멈추지는 않았다.
산 위로 노을이 펼쳐지고 집마다 인기척이 나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이 떠난 빈터를 미루나무가 지켰다. 아이들의 하루를 갈무리하여 결로 새기고 쏟아지는 별을 초록으로 받아내어 위로 위로 가지를 키웠다. 그 나무는 늘 그 자리에서 반가이 맞아주었고 우리 성장의 시간을 켜켜이 품었다.
아이들은 자랐고 고무줄놀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에 관심을 보였다. 새로운 놀이와 새로운 친구에 빠졌고 고민거리가 늘어나면서 뒤를 보기보다 눈앞에 놓여있는 현실을 좇아 걸어가기 바빴다. 더 자라서는 할 일이 많았고 시곗바늘은 빨리 돌았다. 그렇게 미루나무는 잊혔다.
미루나무가 사라졌다.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하는 이도 없이 뿌리마져 뽑혀 나갔다. 그 자리는 농협 창고가 차지했다. 무심한 사람들은 창고의 효용성에 고마워할 뿐이었다. 아무도 성장기의 소중한 한 페이지가 뜯어져 나가는 것을 알지 못했고 시간은 앞으로만 흘렀다.
앞에는 무슨 대단한 것이 기다리는 줄 알았다. 이것이 맞는지 헷갈릴 때마다 조금만 더, 나중에, 라는 말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일 센티미터만 벗어나도 큰일이 나는 줄 알았다.
지나고 보니 아픈 만큼 아파하고 슬픈 만큼 슬퍼하고 죽을 만큼 힘든 일도 겪어야 하는 사람다워지는 과정이었다. 가끔 곁길을 걸어도 좋았을 성싶다.
이제는 숨이 차도록 달릴 필요 없는 안정기다. 재물에 안달복달하거나 자식에게 애면글면 매달리는 것에서 몇 발자국 뒤에 있다. 순리에 따르는 것이 모두가 편안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나이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시간의 여유도 생겼다. 현재를 느긋하게 즐기면 되는데 내 시계는 자꾸 과거로 돌아간다. 앞으로 나아갈 시간보다 돌아볼 시간이 많아진 탓이다.
여름이면 미루나무 아래서 고무줄놀이하던 때를 더듬는다. 놀이를 온전히 즐기며 순수하게 땀 흘렸던 그 시절이 가슴을 물들인다.
씨아질로 뽑아낸 목화 같은 추억들이 몽글몽글 피어 흥건하게 고이는 날에는 잊었던 친구들의 얼굴이 곱게 어룽거린다.
간만에 옛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여전히 단발머리인 그녀에게 미루나무 꼭대기에서 그악스럽게 울어대던 매미와 고무줄놀이하던 친구들 어디 있는지, 추억팔이하며 더위를 식혀야겠다. 지나는 바람에 잎들이 쏴아쏴아 더위를 몰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