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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후에 오는 것들

등록일 2022-03-16 19:52 게재일 2022-03-17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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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영 수필가
정미영수필가

기억의 정원에서 그리운 추억들을 불러내 이름표를 붙여 주고 싶었다. 희미해져 가던 실루엣이 뚜렷한 흔적으로 남았다. 때로는 바람결에 실려 다니는 말들을 내 마음에 빼곡하게 걸어 놓고 날마다 행간을 놓칠세라 열심히 읽었다. 아담한 수필이란 집을 짓기 위해서다.

몇 년 전, 경주 세계문화엑스포 공연장에서 신명나는 사물놀이를 구경했다. 김덕수 명인이 태평소를 불며 등장하자 관객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복을 몰고 가는 길놀이로 시작된 공연은, 사물놀이패의 꽹과리, 징, 장고, 북의 화려한 연주와 조화로움으로 어깨춤을 유발하더니 농악을 기본으로 사물굿판이 펼쳐졌다. 상모꾼의 상모돌리기에서 절정을 이룰 때에는 흥겨운 장단에 내 어깨도 다른 관객들과 어우렁더우렁 들썩이고, 덩달아 손도 박자를 맞추기에 바빴다.

공연이 끝난 뒤였다. 전율이 찌르르 온 몸을 에둘러 나가도 가슴에는 한 줄기 짙은 감동이 여운으로 자리 잡았다. 공연 시간은 짧았지만 구경꾼들의 영혼을 맑게 해 주었다. 그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 내 마음에도 수필바람이 시원스레 불어와 누군가의 가슴을 두드릴 수 있다면. 누군가의 가슴에 스며들어 희망을 주고 기쁨을 준다면 좋으련만.

나는 수필을 사랑한다. 울림을 주는 글을 쓰기 위해 매일 언어의 바다를 헤엄치며 살고 있다. 좋은 작품을 남기기 위해서는 소재가 중요하다. 글감이라는 보물을 찾으려고 나는 항상 두리번거린다. 학창 시절에 소풍의 재미는 보물찾기에 있었다. 나무 밑이나 화단 근처, 돌무더기를 뒤지며 찾던 종잇조각. 학생이었을 때 내 눈빛이 그 순간만큼 반짝거릴 때가 있었던가. 글감 찾기는 내 생활 속에서의 보물찾기다. 빛나는 글감이 떠오르면 며칠을 머릿속에서 반죽하고 숙성시킨다.

자아 성찰의 시기를 거친 내 글쓰기는 주로 밤늦은 시각에 이루어진다. 모두가 잠든 뒤에 수필을 쓰려고 깨어 있는 경우가 많다. 지난겨울은 유난히 마음이 추웠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우듬지를 비추는 달빛 한 점이 있어 차가운 겨울을 이겨낼 수 있었다. 고요히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한 마리 새처럼 조용히 의자에 파묻혀 한 줄씩 적어 내려갔다. 깊은 밤을 지새울 만했다.

가끔 언어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싶을 때도 있다. 주옥 같이 펼쳐지는 언어의 황홀경에 흠뻑 취해 있다가도, 쓰는 작업이 힘에 겨워지면 수필에서 달아나고자 버둥거린다. 하지만 새벽바람의 기척으로 해가 강물 속에 풀어지는 모습을 보면 또 다시 삶의 아포리즘을 받아쓰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햇귀와 타전을 시작하고는, 윤슬을 머금은 수필을 완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수필을 사랑한 후에 오는 것들을 기대하며.

내 사랑의 결실은 책이 출판되는 것이다. 드디어 며칠 전 2022 Prose Quartet ‘작은 것들’ 산문집이 출간되었다. 나를 포함한 세 명의 작가가 StoryLab 숨비에서 기획하고 주최하는 산문 축제에 초대를 받아, 앤솔로지를 출판하고 3월 한 달간 전시회 및 낭독회를 진행한다. 작가들이 보내는 울림과 공감의 파장을 독자들이 폭넓게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꽃샘바람이 불어와도 아파트 화단의 홍매화 꽃눈은 얼지 않았다. 봄꽃이 피어나기를 오매불망 지켜보는 나의 시선 때문인지 앙증맞게 피어났다. 이른 봄, 산책을 나가면 붉게 물들기 시작한 매화 나뭇가지가 나를 향해 봄 내음을 물씬 풍기며 반갑게 손짓한다. 마음 가득 봄빛으로 물들이면 무채색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세상이 훨씬 곱게 보일 거라며, 나보다 인생을 오래 살아온 나무가 나를 위해 덕담 한 마디 따스하게 건네주는 오후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음률로 내 방 창문을 환한 햇살이 두드리고 있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내 가슴 안에 담겨 있던, 기록되지 않은 단어와 추억을 소환하여 수필이란 이름의 옷을 입혀 준다. 수필을 사랑한 후에 오는, 또 다른 것들을 기대하며. 나는 오늘도 분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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