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을 암송하다가 앞부분에서 딱 막힌다. “관자재보살이 반야심경을 깊이 행하실 때 오온(五蘊)이 모두 공함을 밝게 보시고 일체(一切)의 고액(苦厄)을 넘어섰다.” ‘반야심경’첫머리에 나오는 이 구절이 명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반야심경’ 260글자의 본질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오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를 뜻한다.
우리를 포함한 세상 만유의 존재 형식과 실체가 색이다. 색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 수이며, 받아들인 바에 따라 생각을 일으킴이 상이다. 생각에 따라 행동함을 행이라 하고, 행동의 결과를 판단하는 것이 식이다. 예를 들어보자.
강의실에 강아지가 들어온다. 나도 수강생들도 강아지를 본다. 강아지가 색이다. 강아지를 보고 모두 마음이 불편하다. 강의 도중에 왜 강아지가 들어온단 말인가. 누가 주인인가?! 그런 불편한 마음이 수다. 그리하여 나는 강아지를 쫓아내기로 마음먹고 실천에 옮긴다. 강아지를 쫓아낸 행위가 행이다. 강아지를 쫓아낸 것을 판단해보니 조금 지나쳤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식이다.
여기서 색수상행식, 즉 오온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시간적 순차성에 따라 이루어졌다. 육하원칙에 충실한 과정을 모두 거친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인과율이 적용된 게다. 그런데 이 모든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 모두가 공하다는 것이 관자재보살의 깨달음이다. 그리하여 관자재보살은 세상의 온갖 고통과 괴로움을 건넜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더욱 이해할 수 없다. 분명히 내 눈으로 강아지를 보고 강의실 밖으로 몰아낸 다음, 그 행위를 후회한 나의 일련의 행동이 왜 공하단 말인가?!
한 가지는 확실하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내가 노력해온 독서와 사유, 인식이 가져온 지식으로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오온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붓다가 설하신 ‘반야지혜(般若智慧)’와 내가 추구해온 얕은 지식의 범주가 양립하기 불가능한 까닭이다.
그런데 깨달음은 엉뚱한 서책에서 온다. ‘우주의 구조’를 읽다가 대면한 차원의 문제가 실마리를 제공한다. 우리는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이 조합된 4차원 세계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는다. 그런데 초끈이론은 9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이 조합한 10차원을, M-이론은 10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이 조합된 11차원 세계를 주장한다. 여기서 무릎을 친다.
붓다가 말하는 전생과 사후의 여섯 세계가 확연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천상,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의 여섯 공간이 그것이다. 그것을 심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던 내가 초끈이론의 주장과 만나니 눈앞이 환해진 것이다. 시간개념이 없는 개미는 3차원 공간이 아니라, 2차원 면을 움직이는 존재다. 개미에게 인간의 4차원 세계를 말하면, 개미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오온에서 10차원으로 전화(轉化)하는 과정을 보면서 각자 간직한 지식과 관습 혹은 지혜의 깊이와 너비가 얼마나 다를 것인지, 생각하니 새삼 가슴 서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