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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예모(張藝謀)를 생각하며

등록일 2022-02-06 19:16 게재일 2022-02-07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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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1950년에 출생한 현대 중국의 대표적인 영화감독 장예모의 ‘원 세컨드 (1초)’가 상영되고 있다. 대구에서도 상영관이 희귀하여 한 군데서만 영화를 볼 수 있다. 모택동의 문화혁명 당시 하방을 경험한 반동 집안 출신 지식인 장예모의 아픈 기억을 담은 영화다.

3년에 걸친 하방을 마치고 갖은 고생 끝에 그는 모택동이 죽고 난 다음인 1978년에야 북경 영화학원의 늦깎이 대학생이 되어 영화 인생 밑그림을 그린다.

1982년 대학 졸업과 함께 ‘광서영화제작공사’의 촬영기사로 입사하여 본격적으로 영화와 만난다. 1982년 5세대 감독의 선두주자 진개가(陳凱歌)의 영화 ‘황토지’의 촬영감독이 된다. 1987년에 그는 ‘오래된 우물’의 촬영감독 겸 주연배우로 이름을 알린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장예모는 1988년 ‘붉은 수수밭’으로 베를린 영화제 대상인 황금곰상을 받아 세계적인 감독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1992년 ‘귀주 이야기’, 1999년 ‘책상 서랍 속의 동화’로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는다. 1994년에는 ‘인생’으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다. 이외에도 그가 받은 국제 영화제의 수상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가 세계 영화제의 주인공으로 등극한 것은 현대 중국의 복잡다단한 사회·정치문제의 천착이 바탕이다. 소품을 만들되 소품 이상의 사회적 발언권을 확보할 수 있는 역량과 날카로운 시각을 소유했던 덕이다.

1999년 ‘집으로 가는 길’로 대약진운동 시기의 사회상을 그려낸 장예모의 영화 세계는 2002년 ‘영웅’을 기점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한다. 천하를 통일하다 보면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대(국가)를 위해 소(개인과 가문)는 얼마든지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가 일관되게 관철되기 시작한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2008년 북경 올림픽 개막식과 폐막식을 총괄하는 총감독 자리에 오른다. ‘어용 논란’이 불거지기 시작한다.

1990년대 중국 영화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 찬탄의 대상이 되었던 장예모의 영화는 서서히 관객들에게 잊히기 시작한다. 여전히 뛰어난 색감과 활달한 무협을 바탕으로 한 ‘연인’이나 ‘천리주단기’ 혹은 ‘황후화’ 같은 영화도 속절없이 망각(忘却)되기에 이른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 ‘원 세컨드’로 귀환했다. 단 1초를 위해 고군분투를 마다하지 않는 어떤 아비의 삶을 그려내는 따사롭고 온정이 넘치는 영화.

고희를 넘긴 그에게 문화혁명은 여전히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는 듯하다. 대수롭지 않은 싸움으로 여덟 살짜리 딸과 생이별하고 오랜 수형생활을 해야 했던 사내의 고통과 딸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강렬하게 그려져 있는 ‘원 세컨드’. 그와 함께 어린 동생의 소원을 들어주려 도둑질도 마다하지 않는 누이의 살가운 혈육사랑도 애틋하게 묘사된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처럼 장예모의 시선과 연출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특히 부드럽게 춤을 추는 사막의 모래가 연출하는 기막힌 능선의 풍경을 잡아내는 렌즈는 아, 하는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영화 인생 후반기가 환하게 열리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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