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의 이름은 ‘파안재(破顔齋)’다. ‘파안대소(破顔大笑)’라는 한자어에서 따온 것이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크게 웃는 웃음이 파안대소다. 실제로 이런 웃음을 언제 웃어보았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나처럼 웃기 좋아하는 사람이 이럴진대 2022년을 살아가는 한국인들 가운데 파안대소하는 분이 얼마나 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웃음의 기억이 흐려져 가는 개인과 사회, 국가는 건강하지 못하다. 웃음은 건강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유치원과 요양병원 가운데 웃음소리 들리는 곳이 어딘지 생각해보면 결론이 나온다. 전염성 강한 웃음은 건강하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필수 요건이다. 웃음의 걸림돌이 되는 사회악과 시대정신, 개인 혹은 집단의 세력이 강하면 웃음은 사라진다. 웃음 대신에 억압과 강제와 법과 공권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법대로 하자’는 말이 횡행하는 사회는 고장 났거나, 회복 불능의 중증질환을 앓고 있는 셈이다.
법이 지배하는 사회는 언뜻 공정하고 정의로워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착시현상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상군 열전’의 주인공 상앙 혹은 공손앙 내지 상군(商君)의 최후가 그것을 웅변한다. 상앙의 변법으로 전국 7웅의 강자로 부상한 진나라가 훗날 천하를 통일하여 중국 최초의 제국을 이루지만, 불과 15년 만에 망한다. 법가로 통일할 수는 있을망정, 제국을 경영할 수는 없다는 교훈이다.
법이 지배하는 세상에는 웃음이 사라지고 가면이 횡행한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감추고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 인간이 득시글거리는 세상. 웃음은 눈물만큼이나 개인의 속내를 밖으로 드러내는 장치다. 그런데 웃음을 억압하는 제도적 장치가 법률적으로 보장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위축되기 마련이다. 정치풍자와 웃음이 오래도록 금기시된 우리나라 같은 사회에서 웃음은 불경한 것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중세 유럽의 기독교가 강제한 엄숙주의와 경건주의가 웃음과 희극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고 폭력적으로 억압한 일은 우연이 아니다. 기독교의 초월적 절대자 자리에 인간과 인간의 눈이 들어서면서 중세 천년은 종언을 고한다. 그와 함께 인간의 관점과 기준, 인간의 웃음과 눈물이 신과 교회를 대신한다. 근대에 이르러 인간은 교회가 강제한 가면을 벗어던지고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한다. 카니발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코로나의 세계적인 유행과 더불어 우리는 2년 넘도록 마스크의 가면을 쓰고 거리를 활보한다. 우리는 그나 그 여자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진짜 표정과 속내를 읽어낼 수 없다. 모두가 마스크의 외피 안에서 내면을 감추고 살아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인간과 인간의 격의 없는 유대 관계가 약화-붕괴하기에 이르렀다.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 숫자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이해관계의 충돌, 세계관의 마찰, 세대의 불협화음, 서울과 지방의 불평등, 각종 사회적 모순의 격화가 가면 뒤로 숨는 기괴한 현상이 전개된다. 자, 가면부터 벗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