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라면 예상치 못한 사건이 있기 마련이다. 도회지나 아파트에서는 당연지사로 보이는 사소한 것들이 촌에서는 일로 다가오는 수도 있다. 얼마 전에 비운 정화조만 해도 그렇다. 최소 한두 해에 한 번은 정화조를 말끔하게 비워야 한다. 그러려면 지역을 담당하는 사람과 사전 연락하여 일자와 시간을 조정해야 한다.
부쩍 쌀쌀해진 어느 날 아침 아홉 시가 되지 않아서 그가 도착했다. 이미 몇 차례 우리 집을 찾아온 터라 반갑게 인사하고 나는 뜨거운 커피를 준비했다. 다정다감하고 말수도 많은 그이는 이것저것 묻고 충고해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일상적인 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고맙고 반가운 사람이다.
30분 정도 지나 작업이 끝났고, 계좌이체를 하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어어, 친숙한 이름이네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이 초등(국민)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과 이름이 같았다. 내가 언짢게 기억하는 선생님과 이름이 같구나,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분은 학부모들에게 촌지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교사였다.
나처럼 선출직 어린이회장 같은 ‘고위직(?)’ 부모라면 학기마다 최소 1회는 찾아가 촌지를 전해야 했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 부모님은 깊고 오랜 생활고에 시달리는 형편이었다. 정의로웠던 나도 오실 필요 없다고 극구 만류(挽留)하는 입장이었고. 그러던 어느 날 사달이 나고 말았다.
학급당 90명 이상 꾸겨 넣은 콩나물 교실, 그것도 13살 어린 소년들이 무더기로 모여있는 교실이 조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날따라 친구들은 담임이 없다는 이유로 무지하게 떠들고 뛰고 장난쳤다. 그러다가 홀연 모습을 드러낸 그가 반장이 아닌 회장을 부르는 것이었다. 바지 걷어, 하더니 박달나무 몽둥이로 종아리 대신 뼈 있는 정강이 쪽을 인정사정없이 후려갈기는 것 아닌가?! 그런 통증은 처음이었다.
아이들이 떠드는 것과 어린이 회의를 진행하는 회장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열흘 정도 절룩거리며 걸어 다녀야 했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나의 부친은 ‘사표 내라’고 하셨지만, 난 그 당시 사표가 뭔지도 몰랐던 터였다. 어쨌든 돈 봉투 들고 찾아가지 ‘못한’ 엄마 덕분에 모질게 얻어맞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수업 시간에 그분은 일제 강점기에 자신의 ‘창씨개명(創氏改名)’ 경험을 말하면서 ‘쇼모도쇼캉’이라는 이름을 알려주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쇼모도쇼캉’과 그의 인상은 많이 겹쳐 보였다. 그런데 정화조 청소하러 온 사람 이름이 그분 이름과 같았다. 친숙하고 뭔가 형언하기 어려운 이 느낌은 뭐지, 하는 묘한 감상에 젖어 들었다.
그분의 환생이 빨리 이뤄져서 지금 내 앞의 젊은 사내가 그분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을지도 모르잖아, 하는 생각. 하여튼 살다 보면 재미나고 유쾌한 일은 언제 어디서든 가능하리라. 한 해의 끄트머리 감상이 깊어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