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전남대-경북대 인문대학 교수 모임이 있었다. 작년 7월 경북대 ‘인문한국진흥관’에서 개최한 정기 교류 모임 이후 처음이니까, 어느새 1년 4개월이 지나버린 셈이다. 누가 시키거나 바란 것도 아니건만 세월만큼은 꼬박꼬박 어김없이 제 길을 간다. 더러는 무심함을 넘어 냉담함마저 느끼게 하는 것이 시간의 정속 운동이다. 이번에는 여수(麗水)에서 ‘인문학 대중화’를 주제로 하여 활발한 발제와 토론이 오갔다.
제한된 인원과 경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대구-경북과 광주-전남 지역에 인문학을 보급하려는 노력이 역력하게 개진되었다. 다만 나름의 실천 방향과 방법론과 경륜에 따라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거기서도 서로 배우고 갈고 닦아 앞으로 나아갈 방도와 협력할 지점도 환하게 보이는 것이 유쾌했다. 우리 속담에 이르기를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지 않았던가?!
흥미로운 발제와 토론을 뒤로 하고 오동도로 걸음을 옮긴다. 소설(小雪)을 목전에 둔 터라 저녁해가 빠르게 자취를 감추는 날이어서 해거름의 어둠이 이내 찾아든다. 아, 그런데 겨울이 아니라, 5월의 봄날처럼 훈훈한 바람이 갯내음을 전한다. 심훈의 ‘5월의 바다’가 떠오를 만큼 훈풍이 보름달을 두둥실 띄우는 것이다. 간난신고(艱難辛苦)에 시달리던 식민지 조선 아낙의 고단하기 그지없던 삶을 그려낸 심훈의 따사로운 정서와 민족애!
오동도 산책길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말끔하게 단장한 길마다 동백나무가 빼곡하게 서 있다. 겨울이 닥치고 매서운 바람 불면 선홍색 동백꽃이 다투어 피어났다가 모가지째 툭툭, 소리 내며 지상과 작별할 터. 그 장관(壯觀)이 눈앞에 삼삼하게 전개되는 것이다. 오래전 10시간도 넘게 열차를 타고 처음 밟았던 오동도는 이제 없다. 마음의 고통을 달래려 불쑥 올라탔던 야간 삼등열차의 추억은 아득하게 사라져갔다.
먼 화물선과 어선의 등불이 장계의 ‘풍교야박’에 그려진 것처럼 나그네의 객창감(客窓感)과 감상적인 서정을 일깨운다. 어찌 심사가 복잡하지 않겠는가?! 늦어진 저녁 자리에 울려 퍼지는 옛노래 가락이 떠나간 세월을 불러 세운다. 그래, 너는 어디로 갔더란 말이냐?! 우리의 놀랍도록 청정했던 시절과 눈물과 땀방울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이냐?! 모든 사라진 것과 지나간 것이 불러일으키는 애잔함과 향수가 깊게 찾아드는 시각.
어쩌면 인문학은 상실과 망각과 추억의 어떤 지점에서 우리의 시공간과 관계와 인연을 반추하도록 인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문학은 어렵게 특화한 신상품이 아니라, 백거이가 주창한 ‘노구능해(老軀能解)’처럼 쉬워야 하리라. 민족시인 김소월이나 윤동주, 이육사의 시 가운데 이해되지 아니하는 시가 있던가! 시는 모름지기 잘 읽히고 받아들이기 편하며 우리의 영혼을 후려갈겨야 하지 않을까.
오동도의 밤만큼이나 보름밤의 정취도 여간 깊은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사는 정리(情理)가 이런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창공의 달도 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