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득 ②<br/>제3대·4대 민의원 의원 선거
1952년 개헌에서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가 채택됨으로써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으로 나눠지지만, 1954년 5월 20일 제3대 선거에서는 민의원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만 실시된다. 이 선거에서 정당 공천제가 처음 실시되는데 자유당이 제1당, 민주국민당이 제2당이 된다.
“1954년 치열한 선거판엔 집권 자유당의 횡포가 심했어. 무제한 공권력이 투입됐지.
무소속 하태환이 자유당을 누르고 3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된건 굉장한 사건이었지”
“1958년 4대 민의원 의원 선거도 대단했어. 영일군 을구에서 ‘재재선거’도 벌어졌지.
민주당 김상순이 자유당의 부정선거 무효 소송 제기 등 불법·엉터리 선거를 치렀지”
임 : 1954년 제3대 민의원 의원 선거에서 영일군 갑구에서는 박순석, 을구에서는 김익로가 자유당 공천을 받아 당선됩니다. 하지만 포항은 무소속의 하태환(41·일본 리쓰메이칸대학 법문학부 졸·동지상고 교장)이 자유당 공천을 받은 김판석 의원을 누르고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납니다.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 : 당시 선거판이 치열했고 자유당 횡포가 심했어. 하태환은 제헌의원 선거와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영일군 을구에 출마하지만 제헌의회 때는 사퇴하고 제2대에서는 낙선의 고배를 마시지. 하지만 하태환은 보통 인물이 아니야. 어려운 형편에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한쪽 다리가 불편한 몸으로 동지교육재단과 포항대학을 세웠지. 그리고 정치에 뛰어든 사람이야. 위트와 유머가 넘치고 선거에는 귀재였어. 타고난 정치인이 아닌가 싶어. 1954년 선거 막판에 묘한 일이 벌어져. 하태환 후보의 선거운동용 차량이 사라진 거야. 몸이 불편한 사람이 차량이 없으니 선거운동을 어떻게 하겠어. 난리가 났지. 그런데 그 차량을 사흘 만엔가 동빈내항에서 건져낸 거야. 이 사건 때문에 포항이 시끌벅적했어. 선거 막판에 대형 이슈를 만들기 위해 하태환 측에서 자작극을 벌였다는 소문이 돌았어. 하지만 내 판단에 그 소문은 헛소문이야. 몸이 불편한 하태환 후보가 스스로 차량을 수몰시켰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지. 여하튼 그때 무소속이 자유당을 누르고 당선된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이었어. 하태환은 국회의원 당선 후에 자유당으로 옮기고 국방위원장이라는 노른자위 상임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지. 하지만 4·19혁명 후에 정치적 날개가 꺾이고 말아.
당시 선거 상황을 ‘포항시사’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선거에서는 집권 자유당이 공천한 후보자를 당선시킬 목적으로 무제한의 공권력이 동원되었다. (중략) 심야에 후보자의 선거운동용 차량이 동빈동 항만에 수장되는 보기 드문 사건이 일어났으며 선거 당일에도 투표 방해와 공공연한 무더기표 투입 등이 있었다. 그러나 지나친 물리적 관권 개입이 민심을 극도로 자극하여 많은 시민이 탄압받는 후보자를 동정하고 그 선거운동을 자원하는 사람이 속출하고 지지세가 급증하여 선거는 예상 밖의 결과를 낳았다.
-‘포항시사’, 1999, 534∼535쪽.
임 : 하태환이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은 선거에 이점이 되었겠습니다.
박 : 내가 그때 동지중학교 3학년이었어. 선거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될 때였는데 담임 선생님이 종례하면서 저녁 먹고 학교로 나오라고 하는 거야. 누군가 학교에 불을 지른다는 소문이 돌았거든. 자유당 횡포가 심해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어. 투표일에는 오전 수업을 마치고 투표소 주변을 돌기도 했지. 동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투표소를 어슬렁거리면 상대측에서 겁이 났을 거야. 학생들은 한마음으로 우리 학교 선생님(하태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
임 : 포항시 선거구 낙선자 중에 소방서장 문달식(37·포항수산대 졸)이란 인물이 있습니다.
박 :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소방서장을 했지. 수산업도 꽤 크게 했고. 무엇보다 유도에 큰 발자취를 남겼어. 유도 6단이었거든. 대한유도회 창설의 근간을 만들었고 포항에 유도를 도입했지. 덕분에 포항이 유도가 아주 강한 도시가 되었어. 1967년 도쿄 유니버시아드대회 라이트헤비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해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대한체육회장을 지낸 김정행이 문달식의 제자야. 해마다 포항에서 ‘동암(東庵) 문달식 추모 전국유도대회’가 열리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지.
포항시의 초대 민선 시장은 박일천이다. 1952년에 지방자치제가 처음 시행되면서 그해 5월 20명의 시의원이 간접선거로 시장을 선출하는데, 이때 당선자가 박일천이다. 문달식은 1960년 4·19혁명 후 5월 13일 제8대 포항시장으로 취임해 그해 12월 1일 임기를 마친다. 그리고 12월 19일 포항시장 선거에 출마하는데, 이 선거가 시민이 직접 시장을 선출하는 최초의 선거다. 이 선거에서 문달식이 당선되어 제9대 시장으로 12월 30일 취임하지만 이듬해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6월 20일부로 사임하게 된다. 문달식은 두 차례 시장에 취임하지만 임기는 13개월 정도에 불과했다.
임 : 1958년 5월 2일 제4대 민의원 의원 선거가 실시됩니다. 그 이전의 선거 결과를 보면 1, 2위 득표차가 얼마 나지 않았는데 이 선거에서는 득표차가 굉장히 크게 납니다. 포항시, 영일군 갑·을 3개 선거구 모두 자유당 공천자들이 압승을 거두는 것이지요. 포항에서는 하태환이 재선에 성공하고, 영일군 갑구에서는 박순석, 을구에서는 김익로가 당선됩니다. 그런데 영일군 을구에서 ‘재재선거’라는,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 벌어집니다.
박 : 자유당의 횡포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지. 오죽하면 선거를 두 번이나 더 치렀겠나. 민주당에서 김상순(41·하얼빈국립대학 3년 졸) 후보가 등록했는데 무효 처리가 된 거야. 그 바람에 김익로가 압승했지. 그런데 김상순이 등록 무효가 부당하다고 소송을 제기해서 승소해. 다시 치른 선거에서 김익로가 300여 표차로 겨우 당선되었어(김익로 1만 4310표, 김상순 1만 3986표).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야. 김상순 측이 재선거도 불법으로 치러졌다고 소송을 제기해 또다시 선거 무효 판결을 받아냈지. 재재선거는 1960년 1월 23일 실시되는데, 국민 여론이 어떠했겠나. 자유당은 악화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김익로 대신 김장섭을 공천했고, 민주당도 타 지역 출신인 현석호를 공천했는데 김장섭이 큰 표차로 당선되었지.
임 : 당시에 부정선거가 어느 정도 심했습니까?
박 : 그때 현장을 취재한 기자가 ‘동아일보’ 이만섭이야. 8선 의원으로 국회의장을 지냈지. 이만섭이 1932년생이니 젊은 시절의 이야기지. 이만섭이 재선거 개표장인 대송초등학교에 몰래 들어갔는데 밤 10시께가 되자 갑자기 전원이 차단되고 투표함에 정식 개표원이 아닌 사람의 손이 막 들어가더라는 거야. 그 장면을 이만섭이 카메라로 찍고는 필름을 교실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동료에게 던졌지. 그 동료는 곧바로 대구 팔공산 송신소로 달렸고, 그곳에서 ‘동아일보’ 본사로 넘겼어. 다음 날 ‘동아일보’에 그 사진이 특종으로 실렸지.
당시 상황을 다음의 글이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1958년 5월의 4대 국회의원 선거는 엉터리였다. 대리투표가 비일비재했고 야당 참관인을 쫓아내고 투표함도 바꿔치기를 했다. 부정선거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그해 9월 경북 영일군에서 재선거가 치러졌다. 당시 이만섭은 현장 취재를 갔다. 자유당 정권이 동원한 정치 깡패들이 개표장의 전기를 끊고 모아둔 표 중 민주당 표만 가지고 달아나자 민주당 참관인이 “표 도둑이야!”라고 고함쳤다. 이만섭도 “이 표 도둑놈들아” 하고 외치며 쫓아갔다. 취재만 하면 되는 기자가 울컥하는 마음에 뛰어갔다가 깡패들한테 많이 얻어맞았다. 몇 시간 후 개표가 재개됐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사과를 돌리자 이만섭은 분한 마음에 “나쁜 놈들”이라며 사과를 내던지며 항의했다. 그 후 자유당에서 “이만섭이 선거 개표를 방해했다”며 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라고 해서 열흘간 피해 다녔다.
- 최영훈, ‘영원한 청년, 내가 본 이만섭 의장’, ‘용기와 양심의 정치인 청강 이만섭’, 청강 이만섭 평전 간행위원회, 박영사, 2018, 394쪽.
임 : 김상순 후보는 비록 낙선했지만 이만섭 기자가 아주 고마웠겠습니다.
박 : 이만섭과 김상순의 우정은 이만섭이 국민당 총재가 될 때까지 이어졌지. 내가 황대봉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있을 때 마침 이만섭 의원이 나를 불러 “자네 포항에서 왔나, 혹시 김상순을 아나?”라고 묻길래 “가끔 인사드린다”고 했더니 옛일을 이야기해주더군.
박이득
1942년 포항에서 태어나 서울 인창고와 건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포항 MBC, ‘영남일보’기자를 거쳤으며,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경북문인협회 부회장, 한흑구 선생 문학비 건립추진위원장, 포항독립운동사 발간 추진위원장을 역임했다. 수필가로 ‘월간문학’ 등에 작품을 발표했고, 제1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 최세윤 의병장 기념사업회 이사장, 포항문화원 부설 포항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
대담 : 임종석(경북매일신문 부사장) / 정리 : 최미경(시인·동화작가) /사진 : 김훈(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