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학생, 특히 중학생이 사주를 보러 많이 와요! 주말이면 학생 손님들이 줄을 서요.”
역술 공부를 하는 지인의 말이다. 사주를 보기 위해 간이 천막 안으로 들어가는 학생들을 상상해보았다. 학생들의 용기가 놀라웠다. 필자는 학생들이 왜 가는지를 물었다.
“많은 학생이 연애운에 관해 물어봐요. 남자 친구와 잘 되는지, 여자 친구는 언제 만날 수 있는지, 헤어진 친구와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와 같은 내용이에요.”
필자의 의아한 표정을 보고 지인은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해 주었다.
“학생 중에는 연애운(戀愛運) 못지않게 자신의 미래운(未來運)과 미래 직업에 관해 묻는 학생들도 많아요. 이 선생, 요즘 우리 아이들 자신의 미래에 대해 정말 많이 불안해해요. 오죽했으면 자신의 미래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한테 묻겠어요, 그것도 진지하게!”
의아함은 놀람으로 놀람은 죄책감으로 바뀌었다. 지인의 말 중에 “오죽했으면”이라는 말에 필자는 지인을 볼 수 없었다. 지인은 학생들을 대신해서 필자에게 따져 묻는 듯하였다.
‘도대체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미래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필자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자유학년제도 그렇고, 고교 학점제도 그렇고 모두가 학생들의 진로 선택을 돕기 위한 교육제도들이다. 다음은 두 제도의 정의다.
“중학교 과정 중 1학년 1, 2학기 동안 중간·기말고사를 보지 않고, 토론·실습 위주의 참여형 수업과 직장 체험 활동 같은 진로 탐색 교육을 받도록 하는 제도. 학생들이 진로에 따라 다양한 과목을 선택·이수하고 누적 학점이 기준에 도달할 경우 졸업을 인정받는 제도.”
대한민국 교육제도가 그렇듯이 이 두 제도를 위해 정부는 교육계의 운명을 걸었다. 물론 짧지만 시범 학교도 운영하였다. 학생과 교사가 만족한다는 보고서용 결과도 내놓았다. 그리고는 계엄사령관이 되어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결과는 늘 정부가 정해 놓은 결과였다.
교육 이론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이론이라는 것은 늘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교육 이론은 언제까지나 어른의, 어른에 의한, 어른을 위한 이론에 불과하다. 교육 정책가, 정확히 말해서는 교육 몽상가들은 말한다, 어떻게 이런 좋은 교육제도를 이해 못 하느냐고! 이처럼 좋은 교육 환경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교사를 포함해 이 나라 교육인들은 역술인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대상을 대하는 태도이다. 역술인에게 있어 제일 우선은 바로 내담자, 교육계로 말하면 학생이다. 그들은 철저한 서비스 정신을 가지고 자신들을 찾아올 사람들을 위해 공부하고, 준비한다.
필자는 이 나라 교육운(敎育運)을 짧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亡(망할 망)”이다. 필자의 말이 믿기지 않으면, 의미도 없는 학교 시험에 가위눌린 학생의 모습을 보라! 교사에게 묻는다, 당신은 학생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