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지붕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밤새 이어졌다. 봄비치곤 제법 많은 비가 내린 듯하다. 비에 젖어 떨어진 매화꽃잎이 가는 붓으로 곱게 그린 듯 아름다워 밟기가 조심스럽다.
옛 선비들은 ‘송,죽,매’를 세한삼우라 하여 작품의 소재로 즐겨 다루었는데, 소나무와 대나무는 추운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변함없는 모습이, 매화는 한겨울의 추위를 견디고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모습이 미학의 상징이 된 것이다.
조선의 화가 김홍도는 가난했으나 매화를 무척 좋아해 모처럼 그림을 팔아 3천 냥이 생기자 2천 냥으로 매화나무를 사고, 800냥으로 술을 사서 친구들과 매화음(梅花飮)을 즐겼다. 결국 배고픈 식솔들의 몫은 200냥에 불과했으니 문인묵객들의 영감에 많은 의미를 던져주는 나무였던가 보다. 퇴계 이황의 ‘저 매화나무에 물주라’는 유언은 유명하다.
퇴계는 매화를 유달리 좋아해 100수가 넘는 매화시를 남겼으며, 말년을 보냈던 도산서원은 지금도 매화동산이라 부를 정도로 매화가 많다. 그는 매화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 단양군수로 재임하던 시절 외모며 글솜씨가 뛰어난 관기 두향을 몹시 사랑하게 됐는데, 풍기군수로 전근 발령을 받았다.
관기를 데리고 가지 못하는 당시의 풍속 때문에 결국 두향을 혼자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그녀는 이별을 슬퍼하며 매화화분을 선물로 보냈다. 이별이 너무 길어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다시 만나지 못하였고, 관직을 떠난 퇴계는 도산서원에 은거하며 매화사랑에 집착했는데, 아마도 두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아니었을까? 매화를 심고 꽃이 필 때면 밤이 깊도록 그 곁에서 시간을 보냈고, 매화를 ‘매형(梅兄)’이라 부르며 술을 마시곤 했다. 두향이 보낸 매화는 도산서원 입구에 심어져 대를 이어오고 있으며, 지금도 꽃을 피우고 있다니 간밤의 봄비에 그 꽃잎도 거의 내렸으리라.
포항미협과 광양미협이 격년제로 교류전을 주관한다. 광양을 방문하는 해에는 섬진강 매화마을에 들러 매향에 취하곤 하였다. 코로나로 인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매화축제가 취소되었으나 매화마을은 상춘객들로 넘쳐나 꽃보다 사람이 많다는 소식에 씁쓸한 마음이다. 요즘 지자체마다 문화관광 수입을 기대하며 각종 축제를 연다.
매화축제도 전국의 여러 곳에서 열리고 있지만 봄을 즐기는 방법으로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다. 봄을 즐기는 것은 생명의 근원을 느끼는 것이다. 매화가 꽃을 피우는 것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후손을 남기기 위함이며, 꽃이 그토록 고운 것은 모진 겨울 추위에 인고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매화를 사랑한 까닭은 매화의 삶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나이 많은 매화를 고매(古梅)라 한다. ‘높고 뛰어나다’는 뜻의 ‘고매(高邁)’가 연상되는 말이라 어감이 좋다.
고매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현실에서는 우리나라의 수도와 제2도시의 수장을 뽑는 선거전이 치열하다. 오랜 코로나불황으로 빈사상태인 국민들에게 기쁨이나 위로가 될 내용은 없고 졸렬하기 짝이 없는 언행과 LH사태 등이 불신을 끝 모르게 키우고 있다.
“매 일생 한이나 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이라.” 매화를 사랑한 옛 선비들의 기개가 그리운 봄날이 속절없이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