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네 번이나 옮겨진 울진 봉평 신라 비
우리가 까마득한 옛날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문자로 알 수 있는 시대를 역사시대라면 문자 이전의 시대인 선사시대는 유물이나 그림을 통해서 유추할 뿐이다. 역사시대라 하더라도 기록의 문헌이 다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기록유물 중에 돌로 새긴 석비가 그래도 오래간다. 신라시대 비석은 동해안을 중심으로 많이 분포한다. 그 중 하나가 울진의 봉평신라비다.
#. 죽변 봉평리 신라비의 기막힌 사연
갈수록 도로는 거미줄 같이 이어져 전국 어디라도 빠르게 갈 수는 있지만 감동은 반감 된다. 가히 길 공화국이라 해도 손색없는 대한민국이다. 경주에서 울진은 도로를 넓게 잘 닦아놓아 시간은 단축되어도 꽤 먼 거리다. 그러나 구불구불 해안 따라 이어진 바다를 옆에 끼고 가던 옛길의 그 낭만적인 운치는 사라졌다.
울진은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어서 남쪽 후포에서 북쪽 북면까지 길게 놓여있다. 안동도 댐 때문에 수몰지가 많아 옮겨진 고택이 많지만 울진도 이상하리만치 옮겨진 고택들이 많다. 다만 가정집 보다는 정자나 향교를 옮겨 울진을 몇 번이고 오갔다. 가을에는 그래도 희망을 푸른 바다에 담아 왔지만, 12월 겨울바다는 코로나19 여파로 온 세계와 전 국민이 움추린 쓸쓸함을 안고 왔다. 비석박물관 입구에는 울진에 흩어져 있던 강원도 관찰사, 평해 군수, 울진 현령들이 무슨 선정을 베풀었는지 선정비와 오매불망비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3개나 세워놓은 한심한 현령 김태희도 나그네 발길을 멈추게 한다. 주인공 봉평리 신라비를 옮겨놓은 전시관은 코로나19 때문에 문은 닫혀있고 뒤에는 전국의 유명한 25기의 비석을 실물대로 세워놓았다.
1988년 1월 20일 울진 봉평리의 주두원씨는 자신의 논에 긴 돌이 박혀있어 농사에 방해되어 포클레인으로 빼내어 하천에 버렸다. 두 달 뒤인 3월 20일 권대선 봉평리 이장은 버려져있는 이 돌을 정원석 하기 위하여 지나가는 포클레인으로 마을 옆 빈터로 옮겨놓는다. 촉촉이 내리던 비는 돌에 묻었던 흙을 씻어내어 희미한 글씨가 보인다고 이장이 울진 군청에 알리고 군에서는 도에 알려 여러 사람을 거쳐 신라시대 석비임이 밝혀진 것이다. 이와 같이 중요한 유물이 세상에 알려질 때는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발견되거나 알려지는 것이 허다하다. 울진의 봉평리 신라비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가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 봉평리 비에 담겨진 내용
이 신라 봉평비는 어떤 내용을 새겨놓았는가. 높이 204cm로 금이 간 변성화강암의 자연석에 한 면에 400여자(398자)를 신라 특유의 예서, 해서체 중간 형태로 한자를 예술적으로 새겨 넣었다. 아직까지도 완벽한 해석을 못하는 것은 그냥 돌인 줄 알고 포클레인으로 이리저리 옮길 때 떨어져 나간 알 수 없는 30여자의 글씨가 있고, 신라식의 독특한 한문을 사용해 해석하기가 난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를 두고 내용은 고구려에서 신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울진은 고구려인 되기도 신라인 되기도 애매하여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무슨 사건인지 모르지만 지금의 울진(거벌모라, 남미지)지역 신라로 편입되는 과정에 울진 주민들이 길이 좁고 험한 이야개 성에 불을 지르고 성을 침범하는 항쟁을 일으키자 신라중앙군(大軍)으로 반란을 진압한다. 524년(법흥왕 11년) 1월 15일 법흥왕(매금왕)과 13명의 고위 귀족들이 모여 명을 내린다. 신라육부는 사후처리로 칡소(얼룩소) 잡아 피가 솟는 것을 보고 재판한다. 관련자에게 장육십대, 장백대 등의 형을 부과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스린다. 그래서 이 비를 울진에 세운 것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방민에게 주지시킨다는 내용이다.
법흥왕은 법을 흥하게 했다는 이름대로 불교를 공인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신라의 23대 왕이다. 그런데 이 석비를 새길 때 법흥왕(牟卽智寐錦王)이라 하지 않고 매금왕이라 했다. 충주 남한강변에 있는 중원 고구려비(423년 추정)에 이런 내용이 있다. “고구려왕이 점령하고 신라왕(매금·寐錦)과 오랫동안 형제(동생)의 연을 맺는다.” 그리고 이 봉평 신하 비를 세운 524년은 법흥왕 11년인데 삼국사기에는 “가을 9월에 왕이 남쪽변경에 순행하여 영토를 넓혔는데 가야국왕이 와서 만났다.”는 기록뿐이다. 그 다음해인 525년에도 “봄 2월에 대아찬 이등을 사벌주의 군주로 삼았다.”고 기록돼 있다. 전자는 봉평 신라비가 없었다면 울진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는 것이고, 525년에도 울산 천전리 각석에 525년과 539년에 각석한 명문으로 신라시대를 폭넓게 알 수 있는 것이다.
#. 돌에 새긴 신라비와 울진의 향기
지난 8일부터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신라비 중에서 가장 오래된 포항 흥해읍 중성리 신라비를 특별전시 하고 있어 울진 봉평리 신라비를 보고 와서 13일에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평소에는 빽빽했던 경주박물관도 가족들만 간간히 보이고 한산하여 온전히 신라를 만날 수 있었다. 신라비 중에서 가장 먼저 새긴 501년(지증왕 2년)의 중성리 신라비는 포항에서 특별 손님으로 전시되어 입구에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글씨도 신라 특유의 서체로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자연석에 새겨놓았고, 여러 남산신성비와 명할 산성비도 동시에 모아놓았다.
임신서기석 비가 30cm 정도 높이로 앙증스럽게 서있다. 임신년(552년, 651년, 682년, 732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하늘,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집지하고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일 이를 어기면 하늘에 큰 죄를 지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이런 내용으로 두 신라 젊은이의 단단한 결심을 느낄 수 있다.
필자는 80년대부터 남한에 흩어져 있는 신라 비는 다 보았다. 대개의 신라 석비들이 자연석 돌에다 가공 없이 그냥 새기는데 드물게 이차돈 순교비는 6각형으로 다듬고 글자 하나 하나도 바둑판 그리듯 선을 그어 5면에 글자를 새겨 넣었다.
한 면은 이차돈의 목이 잘려 땅에 떨어지고 흰 피가 솟구치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그림을 새겨 넣었다. 이 순교비는 817년(헌덕왕 9년)에 만든 것이지만 이차돈이 26살인 527년(법흥왕 14년) 순교 때의 장면이다. 여기에 이차돈의 아버지 길승(吉升)의 이름이 나오고 봉평 신라비에는 길선(吉先)으로 나오는데 활동 연대가 같으니까 표기 혹은 발음의 유사성으로 같은 사람을 지칭할 것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비 중에 포항 중성리비가 가장 오래되었고 뒤를 이어 503년 포항 냉수리비, 532년 창녕비, 551년 단양적성비, 555년 북한산 순수비. 668년 마운령과 황초령비가 줄을 잇는다.
8회에 걸쳐 울진을 마무리하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우선 행정구역이 삼국시대는 고구려에서 신라로, 조선시대 대한민국 때는 강원도에서 경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운명이었다. 울진읍을 지나다보니 강원도 이용원 간판이 강원도의 흔적을 안고 있었다. 대게도 울진이 원조지만 명성은 영덕에 빼앗겼고, 전국 최고의 금강송 소나무에서 나오는 송이도 명성은 봉화의 송이축제에 빼앗겼다. 최고의 질 좋은 노천탕 덕구온천과 백암온천도 부곡, 수안보, 온양, 동래온천에 비해 빛이 바랬다. 김시습의 송이 예찬 시로 위로를 삼아야 하는 슬픈 운명의 울진이다. 그래도 울진은 깊은 산과 넓고 푸른바다를 안고 천년고찰 불영사와 2억5천만년 전에 형성된 석유굴, 관동팔경 중 제1경 망양정, 월송정이 바다와 숨쉬고 있는 낭만이 흐르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송이를 예찬한 선조들의 글도 많고 여러 문헌에도 전한다.
목은 이색은 “예전 사람들은 신선이 되겠다며 불로초를 찾아다녔는데, 신선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은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송이버섯을 먹는 것이다.”했고 추석을 앞두고 친구로부터 받은 송이에 감동하여 “존경하는 스님을 찾아가서 고상히 즐기겠다.”는 감사의 글을 남겼다. 노계 이인로는 “소나무와 함께하고 복령의 향기를 가진 것”이라 했다. 세종도 명나라 황제께 송이를 보냈고, 연산군은 송이 욕심에 송이 금표지역을 처음 정했고, 왕만 54년 한 영조도 송이를 평생 즐겼고 83세 마지막까지도 송이를 찾았다 한다. 다방면에 많은 글을 남긴 서거정(1420~1488)도 “팔월(음력)이면 버섯 꽃이 눈처럼 환하게 피어라. 씹노라면 좋은 맛이 담박하고도 농후하네. 송이 예찬 시를 남겼다.
일본에서도 한국의 송이 향을 “마츠타케올”이라 하여 최고로 친다. 외갓집이 울진이었던 매월당 김시습(1435~1493년)은 “고운 몸은 아직도 송화향기 서렸네. 마자 이가 시원한 것 깨달았네. 말려 다래끼에 담았다가 가을되면 노구솥에 푹푹 쪄서 맛보리라.”고 송이를 노래했다. 산속의 황금이라는 송이는 북한의 묘향산과 금강산에 많이 나지만, 분단되어 갈 수 없는 곳이고, 강원도 양양, 삼척, 경북 봉화, 영덕, 경주 남산 등에서 나지만 지금은 안동, 청송, 청도, 창녕 등에서도 난다. 동의보감에는 “송이는 맛이 매우 향미하고, 송기(松氣)가 있다. 나무에서 나는 버섯 가운데서 으뜸이다.”고 적었다.
어우야담에 진기한 음식으로 묘향산과 금강산의 송이버섯구이를 꼽았다. 송이는 양양 것도 좋지만, 울진 송이를 최고로 친다. 그것은 소나무의 향과 해풍, 기온이 만들어낸 천혜의 자연조건 때문이다.
봉평 신라비가 처음 있었던 자리에 가보니 예전에 보았던 기억은 아련한데 가까이 붙어있는 죽변 해수욕장에서 불어오는 푸른 동해 바람이 온갖 생각에 잠기게 한다.
/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