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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가 백세의 스승으로 칭송한 고독한 천재 방랑자 매월당 김시습

등록일 2020-12-08 18:54 게재일 2020-12-09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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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옮겨지은 울진향교와 월계서원, 김시습과 임유후
두 번 옮겨지은 울진향교.

울진향교도 두 번이나 옮기는 우여곡절을 겪지만 개교하는 학교의 교사로 교육기능을 다한 울진교육의 요람으로 큰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번화가에서 벗어나 초라한 향교가 되어있다. 월계서원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다. 지리적으로 산이 막혀 낙후된 지역인 울진은 귀양 오거나 무슨 연고로 와서 지방민에게 질 높은 학문의 세계로 이어지게 했다. 가정 이곡과 매월당 김시습, 만휴당 임유후, 조위 등의 문장으로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 머물면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조용히 숨 쉬고 있는 울진향교

늦은 가을과 초겨울이 교차되는 계절은 나아감을 멈추고 자신을 뒤돌아보는 시간이다. 만물이 생동하는 꽃피는 봄과 폭염의 더위를 알차게 보낸 사람들은 수확의 열매라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반성하며 새로운 다짐으로 희망의 내년을 기약하는 게 우리네 삶이다. 그러나 이것도 인간의 의지대로 작동이 안 되는 빨간불이 켜졌다. 그렇게 잘났다고 교만하던 인간을 능가하는 알 수 없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인간의 의지가 무력해지는 것도 받아들이고 자연을 파괴한 인간의 원죄라는 반성부터 먼저 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 동식물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해야 된다. 오늘은 하늘도 감응 하는지 먹구름 짙게 드리우다가 간간이 햇빛으로 새로운 희망을 준다.

이런 어수선한 마음으로 울진 향교에 들어섰다. 정면 골목 좌우와 경사진 향교 주위를 집들이 고만고만하게 들어서 있어 도회지의 달동네와 조선시대를 연상케 한다. 향교 뒤에는 산이 가파르게 받치고 있다. 이웃 평해 향교가 고려시대 창건했다면 울진 향교는 한참 늦은 1484년(성종 15년)에 월변동에 창건했다가 1697년(숙종 23년)에 고성리 성저동으로 옮겼다. 여기서도 인연이 안 되어 1872년(고종 9년)에 현 위치로 옭기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산 아래 비탈지고 협소한 공간이라 동무도 없고 균형도 미흡하지만, 이 향교에서 1908년 사립명동학교가 개교되고, 1945년 해방 후에는 울진국민학교(현 울진남부초등학교)가 개교했다.

뒤이어 지금의 울진고등학교는 1946년 9월에 울진공립초등중학교로 설립하여 이 울진향교를 가교사로 개교하여 사용한 울진교육의 출발점으로 큰 역할을 한 곳으로 의미를 부여해야 된다. 시간을 되돌려 이 향교에서 조선 중기에 근처 근남면 수곡리 출신 예언가 격암 남사고와 울진 선비들의 일화도 아른거린다.

향교를 나와서 비탈진 골목길을 걸어서 산으로 올랐다. 벽화가 군데군데 보여 생기가 돈다. 우리나라 곳곳에 벽화가 많이 그려져 있는데 간간이 멋있고 세련된 것도 있지만 대개가 어설픈 것은 프로 화가들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거의 봉사 차원에서 아마추어들이나 미대생들이 아르바이트로 그리다보니 그런 것이다. 그러나 벽화가 굳이 세련될 필요는 없다. 그 골목과 주위와 조화를 이루면 된다. 여기에는 나라 사랑의 주제로 유독 태극기가 많이 그려져 있다. 마침 마스크 쓴 채 혼자서 그리고 있는 한 분도 화실에서 그림 배우는 분이었다.

산 정상에 가까워지자 우리나라 최고의 질 좋은 소나무 고장답게 미끈하게 쭉 뻗은 붉은 적송의 울진 금강송들이 호위하듯 위세를 뽐내고 있다. 울진은 바닷가에 있다 보니 왜구의 침입이 잦아 이곳에는 고읍성과 고현성이 소실대고 6번이나 옮긴 특이한 읍성인데도 흔적은 거의 없다. 산 정상에는 애국선열들을 기리는 충혼탑(옛 사친정터)이 서있고 일제강점기에 신사 세웠던 자리에는 해방이 되자 망향대를 세워놓았다. 다시 내려오자 비탈진 골목길에 할머니 한 분이 무, 배추 몇 포기를 손수레에 싣고 가는 모습에서 오늘날 쇠락한 향교를 연상하게 된다.

산속에 있는 월계서원.
산속에 있는 월계서원.

#. 두 효자비와 산속에 숨어있는, 옮겨온 월계서원

울진향교에서 하천 따라 월계서원 가는 길가에 두 효자비가 있다. 신안 주씨 효자 주경완은 아버지 주세홍이 학질로 1년 넘게 앓자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묻힌 종이를 태워 술에 타 드려 효험을 보았고, 아버지가 큰 종기를 앓자 추운 겨울에 밤새워 기도하여 토용(土龍·지렁이)을 구하여 그 약으로 낳게 하였다. 어머니도 종기를 앓자 아버지 방법대로 하여 낳게 하였고,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시묘 살이 3년 동안 죽만 먹고 정성을 다해 부모에 효도했다고 1578년(선조 11년)에 정려했다. 지금 비는 1879년(고종 16년)에 세웠다.

그 앞에는 울진 장씨 장서린의 효자도 어릴 때 아버지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죽만 먹었다. 홀어머니께 효도하면서 외출하면 반드시 밤중이라도 집으로 돌아왔고 때로는 호랑이가 태워주었다는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도 전한다.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어머니 입에 넣어 소생시켰고, 3년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예를 다 하였다고 1633년(인조 11년)에 정려했다. 예전에는 효자들은 달리 방법이 없어 주로 손가락 잘라 피를 드리는 방법이 유일했다. 손가락 자른 효자가 양성된 그 시대 효의 한 단면이다.

큰길가 밭에는 중년 지난 부부가 무, 배추 뽑기에 한참이고 허공에 매달려 있는 시래기가 초겨울 바람에 일렁인다.

여기서 하천을 따라 가다가 다리 건너 조금 오르니 숨은 듯이 월계서원이 겨울 햇살을 받고 있었다. 서원 앞에는 산줄기가 언덕 되어 싱싱한 소나무를 꼿꼿하게 세워두고 있었다. 월계서원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서원은 아니고 울진 장씨 관시조인 장말익과 그의 8세손 장양수를 배향하는 문중적인 성격이 강하다. 울진 장계 호월리에 1856년(철종 7년)에 월계사로 출발하여 1862년(철종 13년)에 월계서원으로 사액 받았다가 1868년(고종 5년)에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5년 현 위치로 옮겨 광복 후 월계서원으로 복칭 되었다.

이 서원은 국보각의 특이한 건물이 하나 있다. 장양수급제패지(張良守及第牌)로 현존하는 패지(위임장등의 공식문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려시대 과거제도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그 옆에 장씨 유허비에는 늙은 부부가 떨어진 낙엽을 포대에 정성스럽게 주워 담고 있었다.

농부의 가을걷이.
농부의 가을걷이.

#. 매월당 김시습과 울진에 머물다 간 사람들

고려시대 ‘죽부인전’으로 유명한 가정 이곡(1298~1351년)은 원나라에서 벼슬하고 아들이 유명한 목은 이색이다. 원나라에서 벼슬한 과거급제 자 중에 정식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이곡이 유일하다. 그는 영해 괴시리 마을이 처갓집이라 관동, 울진지방을 주유하면서 선사관, 월송정, 성류굴기 등의 많은 글을 남겨 그 향기가 전한다.

고독한 방랑자 매월당 김시습(1435~1495년)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울진의 선사 장씨(仙槎 張氏)라 울진과는 깊은 인연이 있다. 여덟달 만에 글을 알았고 천부적 자질을 본 외할아버지가 말을 못해도 뜻이 통하는 한문 ‘천자문’을 우리말보다 먼저 가르쳤기에 김시습은 자라서도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붓과 먹을 쥐면 마음속의 생각을 글자로 다 써냈던 신동이었다. 3살 때부터 외할아버지께 글을 익혀 그때부터 사를 지을 줄 알았다. 1439년 봄 5살의 김시습에게 70살의 정승 허조(1369~1439)가 찾아왔다. 늙은 나를 위해 ‘老(노)’자로 시구를 지어 보아라. 하니 곧바로 “老木開花心不老(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다).”했다. 5세 신동 이야기는 유명한데 김시습을 존경을 넘어 숭배한 윤춘년(1514~1567년)의 기록은 “다섯 살에 세종께서 승정원에 부르시어 시로 그를 시험한 뒤 크게 칭찬하시고 비단 50필을 내려주시며 스스로 가져가게 하니 선생은 비단 끝을 이어 매어 어깨에 끌고 가버리니 모두가 놀라 자빠졌다. 이에 이름이 온 나라에 진동하여 ‘오세’라 불렀지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고”고 기록해 놓았다.

김시습은 훗날 50세 무렵에 그 시절을 기억하며 “아주 어릴 때 황금 궁궐에 나갔더니 영릉(세종)께서 비단 도포를 내리셨다. 지신 사는 날 무릎에 앉히시고 내시는 글을 쓰라고 졸라대었지. 참 영물이라고 다투어 말하고 봉황이 났다고 다투어 보았건만, 어찌 알았으랴 집안이 기울면서 굴러 떨어져 쑥밭에서 늙을 줄이야!”라 읊었다.

7,8세에 유가경전을 통달했고, 아홉 살에는 시문을 즉석에서 지을 줄 알았다. 이런 그가 15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어 외가의 농장이 있는 울진의 어머니 묘소를 지키며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다. 어머니의 3년 상이 끝나기도 전에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조숙한 천재는 송광사서 불교에 귀의하고 설잠(雪岑)의 법명을 썼다.

충혼탑 가는 골목길에 벽화 그리는 모습.
충혼탑 가는 골목길에 벽화 그리는 모습.

훗날 “열다섯에 어머니 여의고,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자랐지만 할머니도 곧 땅 속 몸이 되시어 홀연 쓸쓸해졌지.”라고 회고했다. 병약한 아버지는 계모를 두었고 김시습 자신도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못했고 불행한 삶을 시(전하는 시만 2천200여수)로 달래야 했다. 뒷날 정통유학자인 퇴계 이황은 색은행괴(索隱行怪) 하는 하나의 이인(異人)이라고 비판했지만, 율곡 이이는 “백세의 스승으로 공자를 보려거든 그를 보아라.”고 극찬했다.

김시습이 울진 주천대를 자주 찾았지만 주천대란 이름을 지은 만휴당 임유후(1611~1673년)가 1628년 동생 지후가 반란음모로 발각되어 숙부인 예조판서 임취정(1561~1628년)과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하자 사직하고 주천대 옆에 집을 짓고 서 20여 년간 살았다.

조위(1454~1503년)는 김천 출신이지만 아버지 조계문이 울진 현령으로 있을 때 8살 때 울진에 왔다가 14살 때 다시 내려와 공부했다. 매형이 점필제 김종직이라 그이 영향도 많이 받지만 무오사화 때 연루되어 순천 귀양지에서 죽는데 어릴 때 울진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문학적인 자양분을 듬뿍 받아 홍귀달(1438~1504년)은 “구름이 흐르며 무지개를 토하는 만장의 문장”이라고 평했다.

/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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