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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분의 좋은 세상

등록일 2019-12-19 19:56 게재일 2019-12-2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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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는 단 한 가지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지혜라는 것은 그러니까 내가 아는 것을 믿고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데 있지 않겠지요. 모르고도 따라할 수 있고 따라갈 줄 아는 것이야말로 지혜로운 것이겠지요.

궤변일까요? 하지만 저는 요즘 갈증이 심합니다. 무엇을, 어느 분을 믿고 따라야 할지 모릅니다

오늘은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집에는 나와 내 고양이밖에 없습니다. 캄캄할 때 집을 나설 때는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제 삶은 늘 길 위에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그래도 집에는 괭이가 혼자서라도 기다려 주겠지요. 전철을 타고 있는 시간처럼 한가로울 때가 있을까요. 아무리 바빠도 전철 안에서는 뛰어갈 재주가 없습니다.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고나 할까요. 전철 맨 앞칸까지 뛰어가야 무엇하겠습니까. 갈아타는 곳은 뒤에 앉아 있을 때. 더 빠를지도 모르는 것을요.

오늘은 앉아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제가 잘못한 일들, 초조한 일들, 미운 일, 급한 일들 때문에 마음이 고단하지 않아서 좋으니까요. 옛날에는 사람들이 왜 마인드 콘트롤을 배우나 했습니다. 그런 것까지 배워야 하느냐고요. 그런데 이 미련한 소 같은 놈이 어디로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는지요.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앞에 걸음이 좋지 않은 사람이 하나 비척비척 걸어갑니다. 저 분도 오늘의 저처럼 걸음걸이가 좋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은 저도 요즘은 지팡이 신세를 지는 날이 있습니다. 그런 증세가 꽤 오래 되었지만 차차 나아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나가는 전철역 입구 쪽으로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늘 에스컬레이터가 반갑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제 역마다 에스컬레이터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천천히 올라가는 입구 쪽으로 날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이런 때를 미명이라고 하던가요. 지금 빛이 작고 흐리지만 차츰 주위가 환해질 테지요. 새벽에 일찍 길을 떠나면 날이 완전히 밝을 때까지 시간이 길다고 느껴집니다.

드디어 지상으로 올라왔습니다. 세상입니다. 오늘 분의 세상을 일찍 맞았습니다.

오늘은 깨끗한 공기만 마시고 싶습니다. 맑은 사람들만 만나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안부를 묻지 못하는 것처럼 슬픈 일이 없습니다. 오늘 저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좋은 인삿말을 건네고 싶습니다. 그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요.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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