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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등록일 2019-10-24 19:37 게재일 2019-10-2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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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서정주 시인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고 했지만, 내게는 딱히 그럴 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다. 워낙 시골에 묻혀 살기도 했지만, 어디 간들 올바른 정신과 맑고 고운 심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 쉽겠는가.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도 그렇다. 사람들이 주는 기쁨과 위로보다는 사람 때문에 받는 실망과 고통이 더 큰 것이 현실인 것 같다.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상처입고 좌절한 사람들이 사람이 없는 산속에 들어가서 치유와 활력을 얻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사람을 싫어하거나 멀리하자는 말이 아니라 사람에게만 집착을 하여 실망하고 좌절할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날 중에 가장 좋은 날이다. 어느 계절이든 좋은 날이 없지 않지만 나는 청명한 가을날이 그중 좋다. 그 가장 좋은 날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도 좋겠지만, 온전히 나만의 날로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혼탁한 인간사를 저만치 제쳐놓고, 그 보석같이 찬란한 날 속으로 들어가서 이것저것 보이고 들리는 대로 해찰하며 하루를 보내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누리게 되는, 사계절이 뚜렷한 금수강산에서 산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일 년 삼백육십오일, 비바람 눈보라 몰아치는 날이든 고요하고 청명한 날이든 사실은 어느 하루 축복이 아닌 날이 없다.

우리가 누리는 산과 들 하늘과 바다는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들이다. 인간사회의 부귀영화나 지위권세 따위로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라 그렇다. 이렇게 좋은 날들을 두고 비관하고 절망해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인가. 저 가을 들판에라도 나가보라. 눈부신 가을볕과 시원한 바람이 나를 감싸고 코스모스, 쑥부쟁이, 산국, 구절초…. 풀꽃들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긴다. 아무 것도 나를 따돌리거나 업신여기지 않고 오히려 반기니 자괴감이나 박탈감 따위를 가질 이유가 없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는 비록 초라한 존재지만 이 가을날 속에서는 천상천하유아독존, 나는 오로지 나다.

한가롭게 하늘이라도 쳐다볼 여유도 없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 재물을 모으고 높은 지위에도 올라서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던 사람들이 졸지에 망신살이 뻗쳐 만인의 지탄과 조롱거리가 되는 것을 본다. 그렇게 의기양양하던 자부심과 자존감이 하루아침에 수치와 오욕으로 바뀌지 않던가.그러므로 무엇을 위해서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간다는 것에 박수를 보낼 일만은 아닌 것이다. 온갖 편법 탈법 불법으로 스펙을 만들어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는 부모를 보면서 나는 그렇게 못해 주어서 자식에게 미안해 할 게 아니라, 적어도 그런 식으로 자식 교육을 시키지는 않았다고 오히려 자부심을 가질 일이 아닌가.

모든 존재가 그렇듯 인생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살아있는 그 자체로 이유이고 목적이고 충만이다. 어쩔 수 없이 각박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 수밖에 없는 처지지만, 이렇게 좋은 날에는 하루쯤 저 가을꽃들처럼 자족의 모습으로 나를 놓아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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