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학에 대해 문의드립니다. 중학교 1학년인데 전학이 가능할까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의 목소리가 어떤 것인지를 묻는다면, 최근 산자연중학교로 전학에 대해 문의하는 학부모님의 목소리를 한 번 들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목소리만으로도 이미 세상이 수없이 무너졌음을 짐작할 수 있는 학부모님들의 한 서린 목소리는 3월 이 나라 학교의 모습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죄책감에 필자는 최선을 다해 전화를 받는다.
“왜 전학을 하려고 하시는지요?” 이 말은 그동안 참았던 말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아이가 학교 가기를 너무 싫어합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해도 아이가 입을 열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특별한 일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아무리 달래 봐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분위기를 바꿔주면 좀 괜찮을까 해서 학교를 알아보는 중입니다. 또 학교에서도…!”
이 정도 되면 전학 상담이 아니라 교육 상담으로 전화 내용이 바뀐다. 개학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적어도 서너 통의 전학 문의 전화가 온다. 지역은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이고, 학년은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다양하다. 그 중에서 1학년 학생들의 비율이 가장 높다. 다른 학년 학생들의 전학 상담도 물론 마음 아프지만, 특히 중학교 1학년 학생의 전학 상담은 필자를 더 아프게 한다.
중학교 1학년! 이들이야말로 봄과 가장 닮은 학생들이다. 겨울을 이기고 가지마다 돋아난 꽃봉오리를 닮은 학생들! 분명 그 속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그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 갈 에너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 환한 웃음이 가득할 것만 같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아니다. 학생들은 정말 피어보지도 못하고 벌써부터 시들고 있는 꽃봉오리 같다.
도대체 3월 학교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어떤 일이 있었기에 많은 학생들이 3월도 가기 전에 학교를 거부할까? 물론 모든 것을 학교 책임이라고만 할 수 없다. 사회 문제, 정치 문제 등 다양한 요인들이 있겠지만, 학교도 분명 문제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과연 3월 이 나라 학교의 모습은 어떨까? 2019년 3월과 1979년 3월 학교의 모습을 비교해본다면? 크게 달라진 게 있을까? 필자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고. 오히려 필자는 2019년의 교육상황이 1979년보다 훨씬 못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1979년에는 지금과 같이 화려한 교육 시설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의 학교에는 꿈이라는 것이 있었다. 학생들은 열심히 꿈을 찾았고,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더 열심히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다리가 되어 주셨다. 그래서 즐거웠다. “선생님께 도움을 청해 보시죠?” “몇 번이고 찾아가서 아이가 학교에 나올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죠.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방법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전학 이야기만 하시더라고요. 그러시면서 시계만 연신 보셨어요. 시간을 보니까 퇴근 시간이더라고요!”
학교가 만능(萬能)일 수는 없다. 그래도 학교 때문에 학교를 포기하는 학생들이 더 이상 생겨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안다. 그러기에 다음과 같은 시가 계속 나올 것이고, 학생들은 학교 때문에 학교를 계속 그만 둘 것이다. “수업 시간 강의가 시작되었다. (중략) 다시 떠드는 아이들/모두 눈감고 손들어/너희들의 미래는 교실에서 결정된다. (중략) 가르치기보다 아이들 감시에 열을 쏟는 교사/배우기보다 떠들고 조는데 더 열심인 학생들/이것이 대한민국 교육의 현주소/그리고 대한민국 가정교육의 결과/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떻게 될까 (진장춘 ‘대한민국 고등학교 수업 시간’)”
3월 학교 모습이 이러한데, 4월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