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전반 유럽 최고의 지식인으로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를 꼽습니다. 지중해를 바라보며 산 덕분에 그의 작품에는 늘 지중해가 어른거립니다. ‘좁은 문’ 작가 앙드레 지드와 둘도 없는 친구이며 독일의 대시인 릴케와도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13세에 이미 시를 짓기 시작했고, 고전과 문학 서적을 탐독했습니다. 19세에는 혜성과 같이 등장한 젊은 시인으로 명성을 날립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폴 발레리는 세 가지 사건을 겪습니다. 첫째 랭보와 말라르메 두 사람의 천재성에 압도되어 열등감에 빠진 일, 둘째 R부인과의 연애에 실패, 셋째 데카르트가 경험한 ‘지적 쿠테타’를 온몸으로 경험한 일입니다. 지적 쿠테타란 인생 자체를 송두리째 뒤집어 엎는 충격적인 지적 결단, 결심입니다. 폴 발레리는 이후 일체 활동을 중단하고 오로지 자신의 지적 능력을 키우는데만 몰입하죠. 죽을 때까지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갖습니다.
20년 동안 폴 발레리는 사색하고 노트에 생각을 정리하고 시와 문학과 과학 영역에까지 사고를 확장하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인정과 존경, 박수 받는 일을 멀리하고 오로지 내면과 사상을 갈고 닦는데 자신을 바칩니다. 노트가 3만 페이지에 달합니다. 40대에 이르러 폴 발레리는 20년의 은둔을 깨고 ‘젊은 파르크’를 출간하며 프랑스 대표 시인으로 등극합니다. 뿐만 아니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방법 서설’ ‘까이에’ 등의 과학이론서를 발표함으로써 존경해 마지 않았던 데카르트와 흡사한 시와 과학, 철학을 섭렵하는 화려한 지적 탐구 여정을 순례합니다.
그대는 생의 어느 한 순간, 벼락에 맞은 것처럼 지적 쿠테타를 당하신 경험이 있으신가요? 모든 방어 기제를 무력화하고 홀랑 내면을 발가 벗긴 채, 눈물 왈칵 솟구치고 뼈에 사무치는 고통과 호흡조차 곤란한 극도의 아픔 가운데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 군대가 쳐들어와 우리 삶을 온통 휘젓고 뒤집어 놓아, 도무지 이대로 살 수 없다는 항복의 백기를 들고 세상의 달콤함을 떠나 골방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경험 말입니다.
폴 발레리는 말합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아찔한 이야기입니다. 생각을 마비시키고 그저 느낌으로 살아가는 일에 점점 길들여 가는 우리 시대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이런 시대에 길들여지지 않을 그대가 있기에 가슴 뿌듯한 새벽입니다. 오늘 하루도 반듯하게 생각을 정비하고 언어의 씨앗을 뿌리는 멋진 날이길 기도합니다.
/조신영 인문학365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