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휴가를 다녀왔다. 그 기간 동안 세간의 화제가 됐던 게 ‘대통령이 휴가 때 읽은 소설’이었다. 유장하고 미려한 문장으로 우리 민족의 옛말을 되살려낸 김성동의 ‘국수(國手)’와 섬세하고 정치한 문체로 오십 살도 되기 전 이미 일가(一家)를 이룬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바로 그 화제의 소설들.
이 소식을 가장 반긴 건 오랜 침체의 터널을 통과해온 출판계였다. 뿐 아니라 적지 않은 국민들 또한 “문학을 아끼고 향유할 줄 아는 통치자의 출현이 반갑다”는 반응을 보였다.
‘소설 읽는 대통령’의 등장은 ‘소설을 썼던 대통령’의 기억을 소환한다. 누구냐? 프랑수아 미테랑(Francois Mitterrand)이다. 1981년. 예순다섯의 미테랑은 세 번의 도전 끝에 프랑스 대통령에 오른다. 1969년 창당한 사회당(Parti Socialiste) 출신 첫 대통령이었다. 1905년 설립된 인터내셔널 프랑스지회(SFIO)를 모태로 창당된 프랑스 사회당은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진보 정당.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사회주의자 미테랑은 취임 후 국민의회를 해산하고 재선거를 실시해, 사회주의자가 과반을 넘는 의회를 구성한다.
내·외적인 불안 요소가 적지 않았던 1980년대 초반의 프랑스. 젊은 각료들로 내각을 구성한 그는 사회·경제 각 부문에서 과감한 개혁을 시작했다. 문재인 정부의 현재 상황과도 유사하다.
사형 제도를 폐지했고, 부유층에 대한 증세 공약을 실천했으며, 경제와 문화·예술의 중앙 집중을 막는 지방분권화를 더불어 추진했다. 그렇다고 미테랑의 정책이 무조건 ‘좌측’으로만 속도 조절 없이 내달린 것은 아니었다.
1982년엔 “우리도 시장경제 시스템을 인정해야 한다”고 사회당 동료들을 설득했고, 이런 미테랑의 의지는 후일 단일 통화를 사용하는 ‘유럽연합’ 탄생의 출발점이 됐다.
14년간 프랑스 대통령의 자리를 지킨 그는 레지스탕스 동지인 다니엘 미테랑과 1944년 결혼했다. 미테랑의 아내는 남편 못지않은 열성적인 사회당원이자 ‘행동하는 양심’으로 유럽사회의 사랑과 신뢰를 받았다. 그녀의 소수자 보호와 인권 신장 활동은 지금까지도 국가 지도자 아내로서의 모범처럼 이야기된다. 다니엘은 1996년 1월 대통령에서 퇴임한지 7개월 만에 미테랑이 사망했을 때 죽은 남편의 정부(情婦)를 장례식에 초청하는 ‘톨레랑스(관용)’를 보여주기도 했다. 미테랑은 유연하고 낭만적인 진보주의자였다. 1986년 의회 선거에서 패한 그는 보수·우익 정당의 지도자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를 총리로 임명해 언필칭 ‘좌파-우파 동거정권’을 이끌었다. 그의 재임 기간에 적지 않은 수의 중도·우파 각료들이 임명됐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
바로 이 미테랑이 바쁜 일정을 쪼개가며 프랑스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 조그만 방에 틀어박혀 발표되지 못한 ‘소설’을 썼다는 건 아는 이들만 아는 에피소드다.
미테랑의 ‘문학사랑’은 앞서 언급한 정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마자린 팽조(Mazarine Pingeot)에게 이어졌다. 소설가로 데뷔한 그녀는 첫 작품 출간 후 “아주 어릴 때부터 글 쓰던 나를 격려해준 아버지께 감사드린다”는 인사를 빼놓지 않았다.
한국에서 가장 큰 서점인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인근 커다란 돌에 새겨진 문구는 지나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독서로 휴가를 보낸 대통령만이 아니라 필부필부(匹夫匹婦)까지 충분히 매혹할 말이다.
그나저나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소설 읽는 대통령’이 나왔으니 ‘소설 쓰는 대통령’도 곧 만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