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된 문학작품이나 영화·드라마·연극에는 반드시 명품 악역이 있다. 기억에 남는 악역배우 중 으뜸은 역시 1992년에 개봉된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인육을 먹는 연쇄살인마 한니발 렉터 박사를 실감나게 연기해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앤서니 홉킨스(Anthony Hopkins)다. 이 영화에서 홉킨스는 도저히 잊히지 않을 소름끼치는 연기를 펼친다.
인상적인 남북정상회담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장을 상대로 만들어가고 있는 ‘한반도 비핵화’ 프로젝트는 아직은 결과를 예단할 수 없는 모험의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이, 그리고 온 세계가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오기를 기대하는 것이 보편적인 정서임에는 틀림없다.
자유한국당은 국정농단 논란 끝에 벌어진 치욕의 대통령탄핵 사태로 정권을 잃은 정당이다. 지난해 5월에 조기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정권을 넘겨준 자유한국당은 여전히 보수세력의 대표를 자임하고 있다. 한국당이 정부여당의 건전한 견제세력으로서 완강하게 버텨주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제1야당 한국당이 진정성 있는 논리로 집권세력의 과속에 적절히 브레이크를 밟아주는 것은 민주주의의 장점을 살리는 소중한 역할이다. 북한을 상대하는 문재인정권 역시 큰 틀에서 보면 야당의 이성적인 우려와 비판이 협상전략의 지렛대로 작용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미북대화가 예정돼 있는 상태에서 남북대화가 열렸다. 6월에는 각 정당들이 온 힘을 다해 승부를 겨뤄야 할 지방선거가 기다리고 있다. 국민들은 지금 이 나라의 정당들이 국가적 현실에 대해서, 그 해법을 위해 어떤 혜안을 갖고 있는지 지켜보는 중이다. 그러나 최근 자유한국당의 움직임을 보면 전혀 엉뚱한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 얼마 전 자유한국당은 6.13 지방선거 슬로건을 ‘나라를 통째로 넘기시겠습니까’로 결정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슬로건은 한국당이 국민을 상대로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보여주는 패착이다. ‘적폐청산’ 광풍에 휘둘리면서 속절없이 당하고 있는 처지를 감안하면 일견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치적 감각의 촉수를 보편적인 국민정서에 깊이 뿌리박지 못하고 극단지지층의 반응에 세뇌되기 시작하면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정치다. 무엇보다도 ‘나라를 통째로…’라는 슬로건은 남북대화와 북미대화의 실패를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섣부르다. 이 슬로건은 ‘반통일 냉전세력’ 같은 부정적 이미지만 잔뜩 풍기고 있다.
단언하건대, 이 나라의 건강한 보수 민심은 결코 이렇지 않다. 보수민심의 우려는 현재 문재인정권이 추진해가고 있는 한반도 평화구축 방안에 위험 요인들이 많으니 섣불리 낙관하여 기만당해서는 안 된다는 차원이다. 판문점 선언을 ‘위장평화 쇼’라고 물아붙인 홍준표 대표의 촌평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지방선거 보수후보들의 앞길이 캄캄하다.
정부여당이 잘못하는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실책들을 하나하나 따지면서 올바른 대안을 내놓는 건강한 정책야당이 절실하다. 건듯하면 장외로 뛰고, 살찬 비난만 양산해내던 지난 날의 야당행태를 그대로 답습하는 정치로 도대체 무슨 미래를 개척할 것인가. 반대를 위한 반대의 자투리땅에 스스로 갇힌 편협한 야당 모습이 한심하다.
국가적 이슈에 대한 한국당의 단세포적 대응은 옳지 않다. 훨씬 더 성숙하고 차원 높은 정치를 펼쳐야 한다. 나라를 위한 일에도 건강한 악역이 필요하다. 한 맺힌 원귀들처럼 다짜고짜 물어뜯기만 하는 악역으로서는 민심을 결코 되돌릴 수 없다. 앤서니 홉킨스의 명연기에는 결코 가벼운 흥분이 없다. 이토록 경박한 모습으로 보수를 ‘통째로’ 넘길 작정인가. 참된 보수민심의 비명이 정말 안 들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