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인사들과 계성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 신명여학교 학생과 교사가 중심이 돼 전개됐다. 학생들은 일본순사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교복 대신 장사꾼 복장으로 갈아입고 장터로 나섰다. 지금 대구시 중구 동산동에 있는 90개 계단으로 이뤄진 `3·1운동 길`은 당시 학생들이 거사를 준비하며 다녔던 길이다. 서문시장에서 만세를 외친 사람이 1천명을 넘었다. 운동에 참여한 157명이 일본 순사에 체포되고 그 중 76명이 형을 선고 받았다.
90계단 길에서 제중원(현재 동산의료원)을 거쳐 서문시장으로 이어지는 이곳에는 당시 기독교 전파를 위해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이 살던 집들이 남아 있다. 가곡 `동무생각` 속의 청라언덕도 만날 수 있다. 대구의 몽마르뜨 언덕이라 부른다. 작곡가 박태준 선생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이곳은 3·1운동의 역사가 스며있는 곳이다.
100년 전 대구에 처음 들어 와 대구를 사과나무 고장으로 알렸던 사과나무가 보존돼 있다. 독립유공자를 기리는 독립 유공자 명패도 보인다.
90계단 길을 따라 내려오면 길 건너 편에 우뚝 선 성당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나라 3대 성당의 하나인 계산 성당이다. 서울의 명동 성당처럼 대구가톨릭 역사를 대변한다. 그곳을 따라 걷다보면 독립 운동가이며 민족시인인 이상화 선생의 고택을 만나 볼 수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통해 국가를 잃은 우리 민족의 설움과 분노를 표현한 그분이 태어났던 생가다. 대구시민의 서명으로 생가는 간신히 보존될 수 있었다. 3월 8일은 대구시민이 일제의 침탈에 항거해 독립만세를 처음 부른 날이다. 3·1절의 의미를 대구의 근대 역사 길에서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우정구(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