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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崩壞)

등록일 2018-03-02 20:53 게재일 2018-03-02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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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얼마 전에 친구가 눈 덮인 두툼한 얼음장 사이로 시냇물이 흘러가는 14초짜리 동영상을 보내왔다. 동장군(冬將軍)의 기세가 물러나고 봄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시각기호로 전달한 게다. 몹시 추웠던 지난겨울의 위세도 자연의 운항법칙에 따른 순차성에 물러나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산야(山野) 곳곳에서 얼음장이 깨지고, 그 아래로 맑은 물이 콸콸 소리 내며 흐르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봄은 그렇게 굉음(轟音)과 더불어 온다.

나라 곳곳에서 얼음장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한반도 시공간을 옥죄고 있던 시대의 거악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대단하다. 국정농단의 주범들에게 중형이 선고되고, 하수인들도 줄지어 징역형에 처해지고 있다. 지난 세기 60,70년대의 마지막 잔재가 무너져 내린다. 그들과 동고동락(同苦同)했던 정치 모리배들이 여전히 행악질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 또한 시간문제일 따름이다. 낡은 것은 새로운 것을 이겨낼 수 없다. 그래서 신상(新商)이 비싼 법이다.

80,90년대부터 자리 잡은 크고 작은 우상(偶像)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처절하게 붕괴하고 있다. 87항쟁의 결과 우리가 누려왔던 87체제 30년의 의도하지 않았던 눅눅한 자리가 누추하고 언짢은 모습으로 민낯을 드러낸다. 적잖게 나이 먹은 나 역시 그런 추악함과 어리석음과 역겨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절감하는 붕괴의 시간대가 천천히 흐르고 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누군가 견디기 어려운 참담한 고통을 겪었다면 용서를 구하고 고개 숙여야 한다.

돌이켜보면 해방공간 이후 정부수립과 한국동란, 4·19 혁명과 5·16 군사반란, 5·18 광주항쟁과 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도 우리는 68혁명 같은 근본적인 사회혁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2016~2017년 촛불혁명을 경험하면서 70년 누적된 `적폐`를 쓸어내기 시작한다. 두 세대가 넘는 장구한 세월 축적된 패악(悖惡)과 오욕(汚辱)의 더껑이들은 몹시 두텁고 검질기며 전방위적으로 한국사회를 짓눌러왔다. 그래서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우리를 짓눌러왔던 무법, 불법, 초법, 탈법, 위법적인 행악질의 본산인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문화권력이 붕괴하는 소리가 들리는 봄의 초입이다. 모든 붕괴하는 것에는 시대의 잔영이 남아있기 마련. 그것은 광포한 국가주의 내지 극우 이데올로기의 모습을 취하기도 하고, 사법권력의 비호를 받아 명맥을 유지하는 재벌총수의 아들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마침내는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살찌우는 문학과 예술의 `프랑켄슈타인`으로도 현현(顯現)한다. 하지만 붕괴에는 건설의 강고한 에너지가 동시에 잠재해있다. 무엇인가 견고하고 강력하며 끈질긴 세력과 집단이 무너져 내린다면, 혹은 그것을 무너뜨린다면 그것을 대체할 청신(淸新)하고 청량한 신진세력이 반드시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낡은 것들의 퇴장과 붕괴가 없다면 새로운 것들의 등장과 건설 또한 불가능하다. 그래서다. 우리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과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주장하는 까닭은 거기 있다.

견디기 어려운 매서운 추위와 한파를 동반하는 겨울이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따뜻하고 온유(溫柔)한 봄을 맞을 수 없다. 사계절의 순항법칙은 그렇게 우리를 가르쳐왔다. 춘하추동이 되풀이되면서 우리에게 생로병사와 흥망성쇠를 일깨우는 것이다. 우리는 이가 딱딱 맞부딪치는 한겨울의 맹추위 속에서 매화와 산수유의 개화를 내다보지 못한다. 지금과 여기에 함몰되어 버린다. 굳게 얼어붙은 얼음장 아래로 청수(淸水)가 흐르고 있음을 망각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와장창 소리 내며 깨지고 부서지고 무너지고 있다. 낡고 허망하며 어처구니없고 시대착오적인 것들이 하나처럼 붕괴하고 있다. 나의 죄악과 허물도 무너지는 것들과 더불어 낱낱이 붕괴했으면 한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마음 간절하다. 무겁고 어둑한 하늘이 봄을 최촉(催促)하는 비를 몰고 오실 모양이다.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미증유의 위대한 변곡점(變曲點)이 우리와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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