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말 중 가장 무서운 언사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있느냐`는 말이다. 털어 봐도 먼지가 없으면 묻혀서 뒤집어씌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권력에 취한 인간 군(群)의 속성이다. 과연 그렇다. 요즘처럼 `카더라` 방송의 위력이 어마어마해진 세상에 사정기관이 특정해 흘리는 정보에 이름이 한번 오르면 그걸로 끝이다. 전에 없이 권부의 표적사냥이 쉬워진 세상이 되었음을 느낀다.
촛불시위를 거쳐 정권이 무너지는 격변을 겪은 우리에게 `적폐청산`은 대단한 휘발성을 지닌 구호다. 오랫동안 쌓이고 썩어온 구태들을 일소해내자는 주장은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다.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물음은 그야말로 우문(愚問)이다. 오늘 대한민국의 곪고 문드러진 원인을 찾아 치유하자는데 막아설 이유란 왜 있을까.
그러나 질병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세균`과 `바이러스`는 그 치료법이 같을 수 없다. 대개의 세균은 항생제 투여와 청결유지로 없앨 수 있다. 바이러스는 다르다. 종합적인 치료법이 동원돼야 비로소 치료가 가능하다. 바이러스는 아직 인간에게 불가해의 영역이다.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적폐`는 세균 수준이 아니라, 바이러스다. 그 병인(病因)이 결코 단순치 않다. 의사들은 아무리 효과가 좋아도 검증 안 된 신약은 절대 함부로 쓰지 않는다. 약화(藥禍) 피해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적폐청산`은 쌓여있는 폐단을 고쳐내는데 있다. 그런데 작금 벌어지고 있는 양상은 벌집 쑤시듯 과거를 헤집어놓고 거기에다가 마구 살충제를 뿌려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누군가 `적폐`라고 찍으면 일단 망신주고 잡아넣고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야만적인 처단이 거듭된다. 그 가운데 횡행하는 `적개심`은 위험수위를 넘나든다. 정치권의 무분별한 선동은 사법부를 깔아뭉개는 수준으로까지 다다르고 있다.
구속된 전 정부의 인사들이 차례로 풀려나면서 여권 정치인들과 일부 언론들이 난리다. `적폐청산이 암초를 만났다`고 까지 더들어댄다. 사람 잡아넣는 일을 `적폐청산`의 모두라고 여기는 잘못된 인식수준이 여실히 입증되는 현상이다. 그 언행에 빼곡하게 박힌 `적개심`의 송곳들이 새로운 걱정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판사들까지 신상털이하며 포퓰리즘의 먹잇감으로 지목하는 모습은 오만의 극치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1일 오전 대법원에서 열린 고(故) 이일규 전 대법원장 10주기 추념식에서 뼈 있는 말을 쏟아냈다. 김 대법원장은 “직접적이고 직설적인 권력의 간섭이나 강압은 군사독재 시대의 종국과 함께 자취를 감췄지만 재판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들은 아직도 존재한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때로는 여론이나 소셜미디어를 가장하여, 때로는 이른바 전관예우 논란을 이용하여, 때로는 사법부 주요 정책 추진과도 연계하여 재판의 독립을 흔들려는 시도들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인터넷 세상에서 김 대법원장에 대한 인신공격이 마구잡이로 날아다닌다. 지켜주어야 할 권위도, 지켜야 할 권능도 모조리 파괴하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중우정치(衆愚政治)의 조짐들이 무수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 몰이성의 저변에 희뜩거리는 저 `무한 적개심`을 어찌할 것인가. 역사를 깊게 반추하지도, 미래를 길게 바라보지도 않는 이 치졸한 증오의 광풍을 어찌해야 옳을 것인가. 한국정치는 지금 진화하고 있는 게 맞는가.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연설에서 분명하게 말했다. “오늘부터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저를 지지하지 않은 국민 한 분 한 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습니다. 2017년 5월10일, 이날은 진정한 국민 통합이 시작되는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대통령의 다짐은 아직 유효한가. 예상밖의 지지율 고공행진에 흔들린 것은 아닌가.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