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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토끼를 만났다

등록일 2017-08-30 20:50 게재일 2017-08-3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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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욱<br /><br />시인
▲ 김현욱 시인

루이스 캐럴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회중시계를 들고 다니며 말까지 하는 이상한 토끼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일상이 지루하고 따분했던 앨리스는 그 토끼를 따라 굴속으로 뛰어들면서 이상한 나라에서 환상적인 모험을 겪는다. 그런데 왜 하필 토끼였을까?

일반적으로 토끼는 꾀 많고 영리하며 사람에게 친숙한 동물로 여겨졌다. 늘 주위를 경계하고 조심하는 모습을 보여 겁이 많고 약한 사람에 빗대기도 했지만, 달에서 방아를 찧는 상상의 토끼나 기지를 발휘해 용궁을 빠져나오는 지혜로운 동물의 상징으로도 여겨진다. 가만 보면 토끼는 어린이와 닮았다. 미성숙한 신체는 어른에 비해 작고 약하지만, `동심`을 간직한 심성은 때때로 놀라운 직관과 혜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토끼`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동화나 동요에 자주 등장한다.

송찬호 시인의 두 번째 동시집 `초록 토끼를 만났다`에도 화자가 만난 이상한 토끼가 등장한다. 흰 토끼도 검은 토끼도 아닌 `초록 토끼`다.

“초록 토끼를 만났다/ 거짓말이 아니다/ 너한테만 얘기하는 건데/ 전에 난 초록 호랑이도 만난 적 있다니까// 난 늘 이상하고/ 신기한 세상을 기다렸어// `초록 토끼를 만났다`고/ 또박또박 써 본다/ 내 비밀을 기억해 둬야 하니까/ 그게 나에게 힘이 되니까//”(`초록 토끼를 만났다`)

`늘 이상하고/ 신기한 세상`을 기다려온 `나`는 `초록 토끼`를 만난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초록 토끼뿐만 아니라 전에는 `초록 호랑이`도 만났다. 초록 토끼와 초록 호랑이를 만난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나는 그 만남을 `또박또박 써`서 기록해둔다. 왜냐하면 `그게 나에게 힘이 되기 때문`이다.

초록 토끼란 앨리스가 만난 회중시계를 들고 말까지 하는 이상한 토끼와 닮았다. 앨리스는 그 토끼를 단박에 따라 나선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굴속으로 뛰어들려면 누구에게나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토끼를 따라 가지 않았다면 앨리스의 환상적인 모험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초록 토끼를 만났다`의 `나`는 초록 토끼와의 `만남`을 또박또박 써두었고, 기억하고 있으며, 그게 힘이 된다고 고백한다. 도대체 `나`는 초록 토끼를 만나 무슨 얘기를 하고 어떤 일을 겪었을까? 송찬호 시인의 동시집 `초록 토끼를 만났다`는 초록 토끼와의 만남과 모험을 또박또박 기록한 `나`의 비밀 일기장인 셈이다.

송찬호 시인의 동시는 시와 동시의 경계를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동시면서 시가 되고, 시이면서 동시가 되는 조화와 확산의 어떤 지점에 시인은 이미 가닿은 듯도 하고 어쩌면 알에서 갓 태어난 봄날의 노란 병아리처럼 한 생을 거쳐 회귀한 듯도 하다.

동시집 `초록 토끼를 만났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시는 `도라지꽃`이다. 동화적 상상력이 풍부한 이야기로서의 동시도 재미있지만 동시에서 시로 번져가는 수묵채색화 같은 아름다움은 단연 압권이다. 도라지꽃을 들여다 본 것이 아니라 도라지꽃이 꾸는 `보랏빛 꿈`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노루라니! 그런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일필휘지로 그려낸 웅숭깊은 시선에 감전하듯 그저 감응할 수밖에 없다.

“햇살 동터 오는/ 산등성이 아침/ 보랏빛 도라지꽃/ 늦잠을 자고 있다// 곁을 지나던 노루가/ 보랏빛 꿈이 무얼까/ 가만히 들여다보다 간다//”(`도라지 꽃`)

시집이나 동시집을 읽을 때 마음에 드는 시가 있으면 책 모서리를 접어두는 버릇이 있다. 한 권을 읽고 접힌 모서리가 3~5개 정도면 괜찮은 시집이고 10개 내외면 훌륭한 시집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시집은 단 한 번도 모서리를 접지 못하고 내려놓을 때가 있어 안타깝다. 그렇다면 과연 송찬호 시인의 동시집은 모서리가 얼마나 접혔을까? 많이 접힐수록 책날개 한쪽이 부풀어 오른 것처럼 비스듬해진다. `초록 토끼를 만났다`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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